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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티플레저] 작부귀신은 배우가 되고 싶었던 거야
2009-01-23

최익환의 ‘선녀보살’ 점집

약속시간 2시를 어느덧 20분이나 넘기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평소에 타지도 않던 택시를 타고 논현동 어귀에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벌겋고 노랗게 쓰인 현란한 각종 선녀보살 간판들이 즐비했다. 내가 찾은 곳은 그중 허름한 원룸이 켜켜이 들어앉은 한 건물의 이층 입구 집이었다. 띠리띠리 띠리띠리디~ 단음의 <엘리제를 위하여> 초인종과 함께 이십대 초반의 앳된 얼굴이 나를 맞았다. 화려한 무복을 입고 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분홍색이 섞인 쥐색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늦어서 죄송하다는 나의 다소 격앙된 사과와 달리 엘리제는 무표정의 차분한 어투로 불상이 모셔진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어디서 오셨소?” 나는 어디서 소개받고 왔느냐고 묻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의 시선은 내 옆을 향하고 있었다. “친가에서 오셨소?” “네?” 내가 되물었지만 마치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뒷머리를 잡아당기듯 머리가 뒤로 젖혀지며 연방 눈을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아 저런 거구나. 귀신 들릴 때 나타난다는 증상이….’ “그럼 처가댁?” 그리고는 날카롭다 못해 무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잡귀 들렸네. 아까 아저씨 들어오는데 따라 들어오더라고. 40대 중반 되는 아줌마인데, 한복을 입고 있어. 젓가락 두드리며 <홍콩 아가씨> 노래 부르고 있네. 홍콩의 밤거리~.” 순간 소름도 돋고 이 낯설고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 우습기도 했다.

저녁 약속까지 3시간 정도 시간이 남기에 충동적으로 한 선택이었다. 요사이 크게 변화하는 환경 때문에 고민하던 차에 어떤 조언이라도 얻을까 하는 기대감이 컸다. 그런데 내 옆에 귀신이, 그것도 작부 귀신이 붙었다는 엘리제의 첫마디는 여하튼 신선했다. 엘리제는 그 작부가 뭔가 나에게 원하는 게 있다하며 내 직업을 물었다. ‘아니, 귀신 들린 사람이 이 정도는 맞혀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대답했다. 영화감독. 당연한 추리가 가능해졌다. 영화 출연, 이 생에서는 할 수 없었던 배우가 되고자 했던 작부 귀신의 꿈. 그녀는 작부와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영화감독이라 해서 죽은 당신이 덕 볼 것 없으니, 썩 물러가라 엘리제는 앙칼지게 명령했다. 그러고선 내 영화감독으로서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이성적 안테나를 줄이지 않고 우리 친할아버지와 그녀의 할머니를 대신해 그녀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주거니받거니 했다. 뭔가 알 수 없는 비밀이 파헤쳐지는 통쾌함, 그리고 그간 힘들었을 나에 대한 위로들이 주를 이뤘다. 아주 이기적으로 나만을 향한 시간들이고 내가 객관화되는 시간이었다.

외국영화에서 많이 보는 전문적인 심리치료와 달리 우리나라에서 점을 본다는 것은 참 비과학적이고 비주류적인 상담 창구다. 하지만 어디선가 용한 점쟁이, 이제 막 신내림 받았다는 처녀 무당의 소식은 우리, 적어도 나의 관심을 확 휘어잡는 힘이 있다. 얼마 전 알게 된 한 공학박사님께 엘리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저는 원래 그런 거 잘 안 봐요. 교회도 다니는 사람이….” 박사님은 별로 반응이 없는 듯했다. “그래도 전화번호 드릴까요?” 그의 대답은 예상보다 반 박자 빨랐다. “네!”

최익환 영화감독. <그녀는 예뻤다> <여고괴담4: 목소리>를 연출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11기. 저서로 <영화 후반 작업> <영화 변방에서 영화 만들기> 등이 있다.

최익환/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