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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블랙 코트와 아버지의 옷장
김도훈 2009-02-20

아침마다 옷장을 열고 틀린그림찾기를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날이 쌀쌀해서 검은색 더블 브레스티드 코트를 꺼내든다. 손을 집어넣는 순간 잘못 꺼냈다는 걸 깨닫는다. 찾던 것은 다른 검은색 더블 브레스티드 코트였다. 먼저 꺼낸 것보다 길이가 조금 짧고 투박한 모직으로 된 코트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모두 6벌의 검은색 더블 브레스티드 코트가 있다. 반쯤 감은 눈으로 정확한 코트를 찾아내는 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원래는 이렇지 않았다. 내 옷장은 먼셀의 표색체계를 대신할 만큼 다양한 색채로 가득했다. 심지어 자주색과 붉은색이 섞인 꽃무늬 셔츠와 갓난 병아리처럼 샛노란 셔츠들, 현란한 체크 코트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색맹이라도 된 양 블랙, 화이트, 그레이, 탈색된 블루, 네 가지 색채의 옷만 사들이기 시작했다. 개중 절반은 물론 블랙이다.

물론 블랙에 대한 고집스러운 취향에 불만은 없다. 패션지들에 따르면 블랙이야말로 가장 세련되고 가장 도회적인 색이라니까, 블랙을 입는 나 역시 세련되고 도회적인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살 수 있다). 블랙 드레스를 처음으로 패션계에 데뷔시킨 코코 샤넬은 “장례식에 가냐”는 동료 디자이너의 비꼼에 이렇게 답했다지 않은가. “당신 장례식에.” 부모님이야 시커먼 천 좀 그만 두르고 화사한 색깔로 입으라고 다그치겠으나 대학 초년생처럼 촌스러운 파스텔톤의 셔츠를 색색별로 입거나 동대문에서 쇼핑하는 고등학생처럼 온갖 프린트와 패치워크가 난립하는 재킷을 걸칠 생각은 없다. 심플해지는 걸까 옹졸해지는 걸까. 재미있는 건 영화에 대한 취향도 점점 옷장처럼 변해간다는 거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장르 비틀기에만 전념하지 않는 묵묵한 장르영화가 더 좋고, 말없는 안토니오니의 영화가 좋고, 미친 듯한 상상력에 경배를 보냈던 몇몇 예술가들의 장난감 놀이는 정신 사나워서 더이상 별 취미가 없다. 스타카토로 액션을 이어붙이는 영화는 참아내질 못한다.

어느 날 나는 블랙 티셔츠(집에서 편하게 입는 티셔츠도 모두 블랙 아니면 그레이다)를 입고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을 여덟 번째 보던 중 갑자기 아버지의 옷장을 떠올렸다. 아버지의 옷장에 걸려 있는 블랙 슈트와 블랙 점퍼와 블랙 스웨터들이 일렬로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혹시. 이 모든 건 취향이 세련되어지거나 옹졸해진 게 아니라 순전히 유전과 학습효과로 인한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