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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티플레저] ‘텔레걸’은 곗돈을 탑니다
2009-02-27

정승혜의 ‘TV 오락프로’

한주의 시작인 월요일 밤부터 난 남몰래 갈등한다. 내가 좋아하는 유재석과 멋진 여자 김원희의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를 볼 것이냐, 강호동과 그의 친구들은 물론 완전 소중한 아저씨 최양락의 합류로 시작된 <야심만만2>를 볼 것이냐. 뭔 같지도 않은 고민이라고들 비웃겠지만 난 그렇다.

그뿐이 아니다. 좀 시들해지긴 했으나 화요일엔 <상상플러스>를 수요일엔 알토란 같은 재미의 <황금어장>을 목요일엔 편하고 사랑스러운 <해피투게더>를 꼭꼭 챙겨본다. 웃겨주는 프로그램 보기가 취미이며 그것들을 되도록이면 실시간으로 봐야만 찜찜하지 않을 정도의 마니아다. 얼마 전까지도 좋아하는 프로그램 본방 사수를 위해 주말엔 외출을 삼갔을 정도니 어디 가서 자랑 삼긴 참 부끄러운 취미를 가진 셈이다. 아침잠을 포기하더라도 일요일 오전 9시에 성당을 다녀오는 이유는 3개 방송사의 저녁 오락 프로들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아줌마들의 거침없는 수다판 <세바퀴>, 이 나이에도 결혼 체험 한번 해보고 싶도록 샤방샤방한 <우리 결혼했어요>, 여섯 남자의 복불복 여행기 <1박2일>, 즐거운 한바탕 MT 분위기의 <패밀리가 떴다> 등 주말 저녁엔 리모컨 돌려가며 곗돈 탄 기분이 된다. 마무리로 오랫동안 빼먹지 않고 사랑해오던 <개그콘서트>와 절친이 주인인 <박중훈쇼>까지 보고 나면 한주의 마무리 끝.

나이 꽤나 먹은 여자가 더구나 20년간 영화를 하면서 밥을 먹고 살아온 영화인이 영화보기는 오히려 그리 즐겨하지도 않으면? 그러나 내게 TV는 결코 바보상자가 아니라 안 보면 바보가 되는 상자이며 얄팍하고 짧은 그나마의 내 상식을 쌓아준 것도 TV다. 그때그때 유행이거나 꽂힌 드라마는 실시간으로 보고, 놓친 프로들은 케이블을 뒤져 재방송으로라도 보아야 하니 난 결국 텔레비전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다. 그런 나의 별명은 ‘텔레걸’. 함께 일하는 L 감독님에게는 그 때문에 종종 무시(?)를 당한다. L 감독님은 뉴스나 다큐멘터리가 아닌 다른 것을 보기 위해 TV를 가까이 하는 사람은 절대로 이해가 불가능하다며 TV에 열광하는 나를 거의 한심하다는 눈으로 본다. 그러나 적어도 난 사무실을 방문한 꽃미남 배우를 보고 매너없이 “넌 누군데 이렇게 예쁘냐?”라고 하거나 세상 사람 다 아는 여배우를 보고도 “어디 나오셨더라? 이름이?”라고 당황스러운 질문을 던지진 않는다. L 감독님에게 배우들을 들이대 캐스팅을 하고 영화를 찍게 한 사람은 그래도 어쨌든 나인걸.

솔직히 연예인들 이름과 TV 프로그램들을 줄줄 말하거나 유행어에 특별히 민감한 내가 고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 비해 수준이 떨어져 보이긴 한다. 하지만 그런 체면 때문에 나의 유일하고 오래된 일상의 즐거움을 이 나이에 포기할 순 없다. 사람을 만나다가도 집에 급한 일이 있는 양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무한도전>의 무모한 도전기를 보며 받은 감동이 재미없는 영화 보며 시간 죽이는 것보다 마음에 남으니 어쩌겠는가.

이런 나의 과도한 텔레비전 사랑이 ‘길티플레저’의 예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기엔 쑥스러운 대단한 취미 정도까지도 아니지만 이 글을 쓰며 돌아보니 남다른 중독 수준인 것만은 분명하다. 나잇값도 못한다는 소리를 일생 들어가며 꼼꼼하고 부지런하게 코믹 프로들을 챙겨보고 실생활에 응용하며 살아온 결과, 충분히 실없는 사람일 수도 있었건만 다행히 유머 센스를 지닌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며 살고 있다(고 난 믿는다). 누가 뭐라거나 말거나 실망하거나 말거나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나의 텔레비전 사랑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게으르고 귀찮은 내가 남보기 반듯한 취미생활을 새롭게 찾아내서 즐길 일은 절대로 없어 보이니 말이다.

정승혜 영화사 아침 대표. <도마뱀>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 등을 제작했다. 그녀는 강우석 감독이 가장 신뢰하는 영화평자이자 카피라이터다. 종종 일간지와 영화잡지에 칼럼을 기고하며,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찍는다. 또한 하루 평균 몇 백명이 방문하는 인기 블로그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월10일 현재 그녀의 블로그 대문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난 파란 눈동자… 외계인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