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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비비디 바비디 부 세상
강병진 2009-03-13

‘막장드라마’ 특집 이후 지금까지 <아내의 유혹>을 끊지 못했다. 본방사수까지는 아니어도 VOD로 빼놓지 않고 본다. 디시인사이드에 있는 ‘아유갤’(아내의 유혹 갤러리)도 요즘 자주 찾게 된 게시판이다. 내가 가장 신날 때는 우연히 <아내의 유혹>을 본 동료들이 질문을 해올 때다. “교빈은 민소희가 구은재인 줄 알고 결혼한 거야?” “은재 엄마는 딸이 살아 있는 줄 아는 거야?”라고 물을 때면 좋아라 하며 일일이 설명해준다. <아내의 유혹>은 극중의 세계를 움직이는 논리를 이해하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드라마이니 당연한 질문일 것이다. <아내의 유혹>의 평창동(교빈이네 동네)과 정릉(은재네 동네)은 우리가 아는 평창동과 정릉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보면 볼수록 기가 차고 화가 나기보다는 헛웃음이 나는 드라마지만, <아내의 유혹> 속 세상이 부러울 때도 있다. 이곳이야말로 ‘생각대로 하면 되고 비비디 바비디 부’의 세상이다. 영어, 일본어에 능통하고 싶다면 공부하면 된다. 수준급의 그림 실력을 갖고 싶다면 그리면 된다. 어떤 음모든 거침없이 추진되며 음모의 배후는 다시 하나를 감지하면 100가지를 추리하는 이들의 판단력으로 밝혀진다. 무엇보다 부러운 건 이들의 머릿속에 숨겨진 지우개다. 어떤 약속을 했든 마음이 바뀌면 자동적으로 약속에 대한 기억도 사라져버린다. 어떤 죄를 지었든 간에 죄책감도 금방 사라진다. 이 지우개는 다시 뻔뻔함을 생성시키는데, 이게 정말 가공할 능력이다. 아내를 죽이거나, 바람을 피웠거나, 사기를 쳤거나 해도 아무 상관없다. 그들은 다시 사람을 해하려 들고, 바람을 피우고, 거짓말을 한다. 고민이나 걱정 따위가 아주 잠깐인 이곳에는 오로지 행동과 결과만 있을 뿐이다.

이토록 명쾌한 세상이니 부러울 수밖에. 매주 로또를 사는 나로서는 1등에 당첨될 수 있는 곳이고, 그래서 여자친구가 원하는 “한강이 보이고 역세권에 있는 공동명의가 아닌 30평짜리 풀옵션 푸르지오”도 사줄 수 있는 곳이다. 영화인들은 영화를 흥행시키고 싶다면 만들면 될 것이다.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고 싶다면 출품시키면 된다. 정부에서는 운하를 파고 싶으면 파면 될 것이고, 재개발하고 싶다면 철거하면 될 것이고, 제2 롯데월드를 세우고 싶다면 그냥 세우면 될 것이다. 철거민들이 농성하면 그냥 진압하면 되고, 국가안전에 문제가 생기면 그냥 활주로를 옮기면 된다. 뜻대로 되는 게 없다고 느껴질 때, <아내의 유혹>을 위안으로 삼자. 주부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욕망까지 대리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이니 진정한 국민드라마다. <아내의 유혹>이 막장이기 전에, 그런 욕망이 막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