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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월간지 전향자의 꿈
장인숙 2009-03-20

만화와의 첫 인연은 오빠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학교가 끝나고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찾아오라며 엄마는 동네 오락실로, 만화방으로 나를 보냈다. 딱 한권만 읽고 일어난다는 오빠의 말에 옆에 쌓여 있던 책을 뒤적거렸고 그날부터 만화와의 행복한 동거가 시작됐다. 비록 가게에 딸린 단칸방에 사는 삶이라도 만화방 주인 아이들이 너무 부러웠다. 어느 날은 언니가 까만 비닐봉지에 책을 가득 담아왔다. 황미나의 <불새의 늪>. 구교와 신교, 귀족과 평민의 대립, 역동치는 역사 속에서 피어나는 레니비에와 죠엔의 운명적인 사랑은 사춘기 아이의 눈물을 쏙 빼놓았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앞 만화방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으며 새 책이 나오기만 목놓아 기다렸던 <아르미안의 네 딸들>. “인생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라는 대사를 읊으며 집과 학교만을 오가는 일상을 견뎠다.

대학교 졸업이 다가오던 때에는 동네 도서대여점 주인 언니가 부러웠다. 한가롭게 가게 안의 만화책을 보고 있던 언니의 자유로운 일상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십대 후반, 혹독한 제2의 사춘기가 시작됐다. 판타지로 가득 찬 <꽃보다 남자>의 츠카사와 츠쿠시의 사랑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현실을 도피하는 데 충분했다.

주머니에 조금씩 여유가 생기고 만화책을 사 모으기 시작하면서 만화전문서점이라는 신세계를 알았다. 국내에서 발간되는 책부터 일본 원서까지, 만화에 관련된 것이라면 없는 게 없는 방대함에 놀랐다. 그리고 들어오는 책들 중 상당수를 읽는다는 사장님의 얘기에 마음이 혹했다. 전세보증금을 빼서 고향으로 내려가면 작은 만화서점은 차리지 않을까, 대학교 앞이 좋겠지? 한동안 몽상에 빠졌다. 몇년 뒤 회사에서 만화잡지 <팝툰>을 창간하게 됐고 편집부로 자리를 옮겼다. 어릴 때부터 우상이었던 작가들과 작품을 의논하는, 꿈에 그리던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올 3월부터는 격주간에서 월간으로 전환해 마케팅 계획에 해외작품 수급까지, 눈코 뜰 새 없는 날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행복한가? 모든 일에는 기회비용이 있는 법. 서점에 잘 노출시켜 달라며 읍소를 하고, 펑크 난 원고를 받아내기 위해 작가 집까지 찾아가고, 며칠 동안 이어지는 철야 마감을 견뎌야 한다. 직장인이라면 감당해야 할 서류작업에도 치인다. 꿈과 생활은 행복하게 공존할 수 없는 건가, 회의가 밀려올 때쯤, 김창완 옹의 말씀을 되새긴다. 할 수밖에 없어서 일하는 사람과 형평을 맞추려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여덟 가지 이상을 참고 견뎌야 한다고. 그래서 난 오늘도 여전히 만화편집자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