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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찰에게 고문 당해 병신이 됐어”
2001-11-28

항일독립운동에 투신으로 민족주의 체득, 창작의 뿌리로 삼다- 윤봉춘(2)

최경재 목사가 우리를 부르더니 “서울에서 만세 불렀다, 우리한테는 이 태극기가 독립선언서다, 그러니까 이걸 만들어서 밤중에 경찰 몰래 두루마기 속에 넣어가지고 와라. 누구한테든 보이지 않게 주의해라.” 고런 부탁을 했어요.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임무를 다했는데, 고것이 회령에서는 서울보다 한달이 늦은, 양력으로 사월 초하룻날 일입니다.

그 날이 보통학교 졸업식 날입니다. 예배당에서 열두시에 종을 치면 보통학교 졸업식장에 모인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그냥 몰려서 나올 작정입니다. 나와서 우편국 앞에 모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거기서 최 목사님이 강행을 하고. 그 다음에 보통학교 선생 강창희라고, 이분이 애국자입니다. 이 강 선생이 학생들에게 나눠줄 만한 숫자의 태극기를 미리 학교에다 운반했습니다. 자기 앉는 책상에다 보자기를 펴고 밑에다 감춰놨습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학년 아이가 뛰어왔습니다. “큰일났습니다. 강창희 선생님이 붙들렸습니다. 태극기가 발각이 됐습니다.” 이렇게 됐단 말이야. 이 최 목사님이 얼굴이 하얘지더니 우편국 앞에서 집합하는 일은 포기한다, 그러고는 학교에서 종을 울리고, 학생들이 앞장섰습니다. 그러니까 목적지는 헌병대까지 가는 거죠. 그래야 큰 시가지는 다 돌아댕기니까. “조선독립만세!” 하고 앞장선 놈이 만세 부르면 따라서 만세 부르고. 키 큰 학생들이 태극기를 막 그냥 휘저으면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이 군중심리라는 게 참 갑자기 생기는데 한번 생기면 막을 길이 없거든요. 그냥 쫓아 나와요. 처음에는 일본 놈들이 말을 타고 칼등으로 치면서 다니다가, 조끔 있다가는 뻘건 물감을 만들어가지고 “뻘건 물감 묻으면 모조리 다 잡아라” 한 겁니다. 우리는 뻘건 물이 묻으면 아무 데고 뛰어들어가서 옷을 뒤집어 입거나 바꿔 입고 또 뛰어나가는 거죠. 그냥 선생, 목사, 학생들 할 것 없이 잡아들여 가는데 헌병대 차, 자기네 사무실, 창고 막 실어넣었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난 안 잡혔습니다. 그러나 집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죠. 그래 사흘 있다가 돌아왔어요. 이때쯤 되면 다 정리됐겠거니 하고선 오니까 다들 재판에 들어갔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목사님 점심 밥그릇 해가지고 헌병대에 들어가다가 문간에서 잡혔어요. 이때 6개월 형을 받았죠.

독립군 색출 빌미 두만강변 3km 불질러

그 후에 또 ‘간도 도판부 사건’이란 것이 있습니다. 도판부 사건이라는 게 아까 얘기한 박명우 선생(전회 참조- 필자)의 얘깁니다. 우리는 회령에 있으면서 박 선생의 지령을 받습니다. 이게 뭔고 하니, 두만강 건너가서 싸리밭, 이제 도판부에 집을 지어가지고 연락을 나눈다,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이 쳐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회령에 있다가, 그러니까 우린 정의대, 결사대죠. 회령과 청진 사이에 미살릉이라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험한 큰 능이 있습니다, 그 미살릉 터널을 포위하는 겁니다.

인제 그 사건이 어떻게 발각되었는고 하니, 북간도에서 독립군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가지고 큰 부자나 왜정에 아부하는 이런 사람을 골라서 데려갑니다. 저녁때 되면요, “까마귀 있나?” 해요. 친구가 부르듯이. “누군가?” “날세. 좀 나와보게.” 나와보면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그냥 들어가려고 하면 칼을 쓱 들이밉니다. “아무 소리말고 같이 가자.” 어깨동무한 채로 그냥 갑니다. 가서 두만강을 건넙니다. 가서는 사람 보내서 편질 합니다. ‘아무 날, 아무 시까지 군자금 아무를 어디다가 놓고 가라.’ 그렇게 해서 독립군도 군자금을 모집합니다.

그래서 이제 총독부 군사정부에서 여기 사단장에게 명하기를 “함경북도 회령 연안 그 저쪽을 은밀히 경계해라. 독립군들이 자주 건너오는 경우가 많다” 그랬거든. 이 사단장이 군대를 풀어 가지고 두만강을 건너갔습니다. 두만강에서 토벌을 시작했어요. 그때 두만강 건너편에 3키로 내에는 불바다였습니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때 두만강 연안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삼천칠백몇십명인가 죽었습니다.

아주 대량학살을 했습니다. 어느 게 독립군인지 모르니까 그냥 집집이 들어가서 무차별로 학살을 했습니다. 사람이 도망가면 쫓아가서 차고 팍 찔러버리고,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그렇게. 해서, 도판부가 발각됐습니다. 고 이후로 아홉 사람인가 열 사람이 체포되어 가지고 싸리밭 본부 앞에다가 웅덩이를 팠습니다. 그 웅덩이에다 줄줄이 앉혀놓고, 앉혀놓고, 목을 푹푹 땄습니다.(나운규가 연출한 <두만강을 건너서>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바탕에 깔려 있는 작품이다. 일제 검열당국도 이런 정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랑을 찾아서>로 개명하라고 신경전을 벌였을 것이다.- 필자)

일본인 살해 혐의로 십자가 형틀에 묶여

어쨌거나 내가 운규(나운규 지칭- 필자)보다 먼저 잽혔어요. 하루는 집에 들어갔더니, 마침 형사가 날 찾아왔다 말이야. 내 방에 구두 한 켤레가 딱 놓여 있는데, 그때 형사들이 신는 신발이 딱 눈에 짚이더라구요. 그래 그 자리에 딱 섰는데, 안방에서는 형사가 “자네, 그 방에 주인이지?” “네”. 지금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갔습니다. 유치장에다 팍 집어넣자 머리에 뭐가 떠오르는고 하니, 두만강변에서 총살당하는 게 머리에 팍! 도판부 사건이 떠오르고. 눈감고 잘라고 하면 꿈에서 내가 총 맞고 막 쓰러지다 깨는 거예요. 식은땀이 바싹바싹 나죠.

아무튼 만세사건으로 감옥에 있다가 나와 가지고는 회령에 있다가 북간도로 해서 러시아를 향했습니다. 김용국이라고 하는 사람하고, 나하고, 운규하고 해가지고 세 짝패가 만주로 방황했습니다. 갔더니 그때 광복군에 가담한 사람들이 간혹 나타나 가지고 소개했습니다. 젊은애들이 와서 감옥도 들어갔다 나왔다고 하니까 “학생들은 보니까, 공부할 나이고 하니까, 공부하시오” 그러는 겁니다. 지식인들이었죠. 하여튼 무식하며는 안 된다, 그거를 얘기하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그 독립지사의 말을 듣고 그 길에 돌아왔단 말이에요. 공부나 한다, 뭐 이렇게 단순한 생각으로 돌아왔거든요?

그런데 이때 도판부가 발각이 됐다, 도망가라 하는데 한신돈이라고 하는, 회령서 소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이 댕긴 친구가 잡혔습니다. 강동면에 금융조합하는 일본사람의 서기가 하루는 “독립군이 들어와서 다 죽이고 금고를 가지고 도망갔다. 범인 잡아라.” 이래서 강동군 일대에서 범인 수색하는데, 내가 있는 마을까지 소문이 뻗쳐서 들어왔단 말예요. 내가 그래서 이상스럽다 하고 도망갔거든요. 그런데 한신돈이 이 친구가 체력이 아주 약한 사람이에요. 이 친구가 잡혀서 윤봉춘 아무개하고 여기 와서 헤어졌다는 걸 말하고, 자긴 범인 아니라고 그러다가 이제 얼음 넣은 물구더기에다가 까꿀루 매달고 실컷 패주고 이러니까 까무러치면서 예, 죽였습니다 그런 거죠. 그러니까 날 살인범으로 몬 겁니다.

서울에서 도판부 사건 겸 살인범으로 잡혀가지고 취조를 시작하는데, 이놈아! 너 친구 한신돈이라고 아냐구, 지금 감옥에 있다구, 너허구 공모하지 않았냐구, 니가 조합서기 총으로 땅 쏘고 도망가지 않았냐구, 거짓말 마라고 매가 들어옵니다. 이 매는 정확합니다. 때리면 뻥뻥 소리가 나요. 기운 센 사람도 한 서너대 맞으면 못 견딥니다. 이건 취조가 아니라 아주 복수예요. 퍽퍽 쓰러집니다.

마까 바야시라는 사람이 취조의 명물인데. 처음에는 바닥에 기왓장을 뿌립니다. 빤쓰고 뭐고 다 벗겨요. 그래가지고는 냉큼 들어서 기왓장 위에 꿇어앉힙니다. 기와가 여기 무릎에 닿지 않습니까? 웬만하면 아슬아슬 이지러집니다. 가만히 두면 좋은데, 이마를 밉니다. 그러면 중력 때문에 뼈가 아주 오스러들어요. 내가 이제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친구를 나한테 면대해다오. 그 사람 기운이 약해서 없는 사실을 있다고 말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랬죠. 그랬더니 건방지다 말야, 그냥 구둣발로다가 내칩니다.

그래도 아니라고 일주일을 계속했더니, 그 다음에는 십자가 형틀에 발을 묶고 손을 묶어서, 한놈은 머리카락을 이렇게 쥐고 있고, 한놈은 배를 가로탑니다. 배를 타고 앉아서 바가지에 물을 푸고 그 물에 고춧가루와 소금을 섞습니다. 그걸 코 위에다가 쭈욱 붓습니다. 숨을 쉬면, 코에 고춧가루하고 짠 게 들어가면서 칵칵 재채기나고, 눈에도 들어가고, 귀에도 들어가고 구멍이란 구멍은 다 들어가. 그래도 그냥 견디는 거야. 일단은 딱 참았다가 홱 뿌리치는 거죠. 그동안에 숨을 쉬죠. 그러니까 구둣발로다가 막 뭉개요. 그러면 기절하거든요. 기절하면 저희끼리 담배 태다가 정신이 들면 “자 또 시작하지” 이럽니다. 그래서 완전히 기절이 되면 문초에다가 집어넣습니다. 발길로 때리고.

그렇게 되는 바람에 내가 지금 걸어가는 거 보면 삐뚤었죠? 갈빗대가 상했거든요. 늑막이 상하는 바람에 폐가 작아진 거야. 숨을 많이 쉴 수도 없고. 높은 데 올라가거나 쪼끔만 힘든 일 해도 숨이 차고. 그 전에는 참 건강했습니다. 고춧물, 짜고 매운 물 들어가게 되면서 한짝 귀가 밝지 못한 병신이 되었어요.(윤봉춘의 작품 경향이 해방 이후까지 반일 민족주의로 시종일관하는 점, 군국주의 선전영화 이외에는 만들기 어려웠던 일제 말기에 일체의 영화활동을 중단하고 잠적한 것도 이 같은 삶의 역정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필자) 정리 김경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이영일 출판프로젝트 연구원 netrin@orgio.net

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