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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싱글 고릴라
장미 2009-06-05

영화제의 나날이었다. 여성영화제를 보내니, 전주영화제가 닥쳤고, 전주 출장을 다녀오니, 환경영화제가 기다렸다. 전주의 기운을 떨쳐내기도 전에 찾아들었지만 환경영화제의 상영작들은 각별했다. 상처 입은 자연은 위태로웠으며, 멸종 직전의 산골 마을은 유독 외로워 보였다. 간혹 유머로 칼을 벼린 블랙코미디도 있었다. 이를 드러내지는 않지만 충분히 위협적인 메시지들. 특히 <이보, 동물원 고릴라의 일생>은 기이한 목소리로 가득 찬 다큐멘터리다. 환경영화제 기획에서 미처 꺼내놓지 못한 이야기를 여기 적는다.

18살짜리 수컷 고릴라 이보에 대한 ‘비공식적인 전기영화’인 이 다큐는 인간 여성들의 한탄을 흘려보내면서 시작된다. 그 목소리들은 요즘 남자들에 대해 불평한다. 묘한 오프닝이 지나면 이보의 생을 추적하는 기록들이 이어진다. 동물원 관계자는 암컷 고릴라와 교미하지 못하는 그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중년 여성들은 “이보가 정말 특별하다”고 입을 모으는 반면, 동물원의 일꾼들은 맥주를 마시면서 “그가 금발 여성 앞에서 발기한다”며 낄낄거린다. 품위를 가장할 줄 아는 나이 지긋한 남성은 인간 여성에게 사랑을, 아니, 성욕을 느끼는 이보를 대놓고 모욕하지 않는다. 데이트 전쟁에서 퇴보한 지 오래인 여성들은 철창 너머의 이보를, 거의 연인처럼 어르고 달랜다. 그에 반해 설익은 청년 무리는 이보가 우습다. 그들은 이보가, 자신들이 차지해 마땅할 인간 여성을 흘끗대는 수컷 고릴라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런 비웃음을 숨기지도 못한다. 그게 먹이사슬에서 우위를 점한 다른 종 수컷의 진심일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보는 암컷 고릴라를 임신시키지 못한다. 그를 향해 쏟아지는 무수한 목소리들을, 아니크 반 비이크 감독은 얼마간 수상쩍다 여긴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이 사건의 주인공이자 피해자인 이보까지도. 그리고 질문한다. 삶이 편해질수록 수컷들은 새끼를 낳아 키우려는 열망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을까. 동물원은 종의 생존에 관심없는 잘생긴 싱글 수컷 고릴라에게 정말, 완벽한 장소일까. 이 이례적인 수컷 동물에게서 책임감 없는 인간 남성에게 실망한 여성들은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사랑? 성욕? 우정? 아니면 호기심과 동정심? 이 다큐를 보고 나니 동물원이라는 공간에서 건져올렸던 일말의 감상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맞다. “동물원은 절대로 발명되지 말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