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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해밀턴 감독의 <백주의 악마>
2001-11-29

명탐정, 다정하고 게으른

Evil under the Sun 1982년, 감독 가이 해밀턴 출연 피터 유스티노프 12월2일(일) 낮 2시

원작자 애거사 크리스티는 탐정 ‘포와로’ 캐릭터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미발표 소설에서 크리스티는 포와로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난폭함까지 보였는데 “소설가 사후에 캐릭터가 다른 목적으로 이용될 것을 두려워한” 작가의 배려였다고 한다. ‘포와로’라는 캐릭터는 역대 탐정 가운데서 가장 게으른 인물로 기억될 만하다. 행동보다 한 발자욱 뒤로 물러선 채 관찰을, 현장답사보다는 정보 수집력을 우위에 둔 것. 포와로는 ‘회색 뇌세포’의 영민함에 기대고 있으며 손꼽히는 명탐정으로 스스로를 소개하는 점, 그리고 이상한 모양의 콧수염으로 특징지워진다. <백주의 악마>는 피터 유스티노프가 포와로 탐정으로 출연하는 미스터리물. 포와로가 등장하는 여느 크리스티 원작이 그렇듯, <백주의 악마> 역시 고전적 추리물의 이야기구조를 취하고 있다.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모든 사람들이 용의자로 지목받지만 별다른 물증은 없다. 혼란의 와중에 탐정은 하나씩 추리를 쌓아가고, 마지막 순간에 용의자들을 한 장소에 집합시킨다. 살인사건의 숨겨진 퍼즐을 풀 시간이 된 거다.

아드리아해의 외딴 섬에 사람들이 휴양차 방문한다. 어느날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미움을 사던 알레나가 타살된 채 발견된다. 알레나는 한 유부남에게 관심으로 보임으로써 자신의 남편, 상대편 아내에게 심적인 상처를 주었다. 이외에 영화제작자와 호텔 여주인 등이 알레나에게 살의를 품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바꿔 말하자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알레나를 살해할 만한 동기를 갖고 있었던 것. 포와로 탐정은 수사에 착수하지만 곧 난관에 봉착한다. 문제는 용의자들에게 모두 알리바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백주의 악마>의 가이 해밀턴 감독은 거장감독들 밑에서 도제수업을 받았다. 캐롤 리드와 존 휴스턴, 쥘리앙 뒤비비에 등의 조감독을 거치면서 연출수업을 받은 것. 감독 데뷔 이후 가이 해밀턴 감독에게 결정적인 부와 성공을 안겨준 것은 유명한 시리즈였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와 <황금 총을 가진 사나이> 등 시리즈 여러 편을 연출하면서 그는 액션과 미스터리 등 장르물에서 재능을 과시했다. 1980년대 초반에 해밀턴 감독은 애거사 크리스티 원작을 영화로 여럿 만들었는데 바로 <거울살인사건>과 <백주의 악마> 등이다. 해밀턴 감독은 원작자의 의도, 다시 말해서 범죄 미스터리물 형식을 갖추되 캐릭터들 매력을 극대화한 소설의 묘미를 제대로 살려낸다. 영화에서 섬을 방문한 사람들은 부유하고 경제력이 충분하지만 도덕적으로는 다들 문제가 있다. 이들 남녀관계는 도표로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서로를 증오할 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탐정 포와로는 측량하기 힘든 자신감과 뛰어난 두뇌회전으로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의 황폐한 내면을 들여다본다. 그는 단순한 추리보다 인물들의 추락한 도덕의식을 은근히 공격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일강 살인사건>(1978) 이후 다시 포와로 탐정 역을 맡은 피터 유스티노프는 포와로 역할을 거쳤던 여느 배우보다 유머러스하고 다정한 느낌의 탐정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