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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표기법 유감
주성철 2009-06-26

또 한 명의 위대한 배우가 세상을 떴다. 데이비드 캐러딘, 도금봉에 비해서는 딱히 기사화가 안됐지만 <용쟁호투>의 석견을 빼놓을 수 없다. 무술대회를 개최해서는 울버린 손을 하고서 라스트에 이소룡과 거울방에서 싸웠던 악당 ‘한’이었다. <영웅본색3>에서는 베트남에 살던 주윤발의 숙부로 나왔다. 하지만 그가 홍콩영화계에 전설로 남은 이유는 과거 수십편이 만들어진, 그러니까 50년대에만 무려 60여편이 만들어진 왕년의 인기 시리즈 <황비홍>에서 단골 ‘원조’ 황비홍으로 등장하던 관덕흥 사부의 반대편에서 늘 악당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소룡이 <용쟁호투>에 그를 끌어들인 것도 다 그런 오마주였고 실제로 그는 이소룡의 부친과도 절친한 사이였다.

안타까운 건 국립국어원의 표기법에 따라 성룡을 청룽이라 하고, 장만옥을 장만위라 하듯 석견 역시 느닷없이 무슨 ‘스잔나’나 ‘스뎅’도 아닌 ‘스젠’으로 기사가 뜬 것이다. 사람들의 실제 대화와 별개로 오직 방송과 일간지 기사로만 등장하는 표기법이다. 모두가 사랑하는 ‘짜장면’도 ‘자장면’으로 바꾼 것도 이들인데, 얼마 전 <짜장면의 진실>이라는 프로를 보니 실제 중국인들 역시 대부분 ‘짜장미엔’으로 발음하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중국의 ‘작장면’과 우리의 ‘짜장면’은 완전히 다른 음식이라 해도 무방했다. 게다가 이런 표기법의 문제는 청룽, 저우룬파, 장궈룽 같은 유명인들만 이름을 지어주고 임달화, 웅대림처럼 딱히 국내에서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름도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거다. 견자단은 최근 몇년 새 뜨기 시작하면서 ‘쩐즈단’이라는 새로운 호적이 나오길 기다리는 중이다. 한국에서 활동하려면 일단 국립국어원에 가서 주민등록이라도 해야 하는 모양이다.

내 생각에는 원칙을 모색하는 가운데 종전의 한자음과 적절하게 혼용하는 게 맞다고 본다. 새로 등장한 <색, 계>의 탕웨이를 한자음대로 굳이 ‘탕유’라고 하지 않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처럼. 아니면 진짜 원칙대로라면 보통화가 아니라 광둥어로 표기해주는 게 맞다. 아무리 요즘 홍콩에서 보통화 의무교육을 한다지만 실제 광둥어를 주로 쓰는 홍콩 가서 청룽, 왕자웨이라고 해봐야 아무도 못 알아듣는다. 게다가 현재 규정대로라면 ‘중국’은 무조건 ‘중궈’라 해야 하고(“이번 올림픽에서 중궈 선수들은”) ‘공자’도 사실은 ‘쿵쯔’라고 불러야 한다(“저 멀리 산을 보시던 쿵쯔 가라사대”). 수십 년 넘게 한국에서 잘 살아오던 성룡이나 주윤발이나 석견을 이제 와서 청룽, 저우룬파, 스젠으로 부르는 것은 마치 공소시효가 지난 피의자들을 다시 억지로 소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어가 국민을 괴롭히는 이 현실을 어떡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