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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점프 컷] 서정 속에 칼날을 품었네

<걸어도 걸어도>가 오즈 야스지로 영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그 무엇

가족드라마에 대해서는 집 안을 어떻게 찍고 있는지 유심히 보게 된다. 특히 일본영화의 경우에 전통식 집안이 배경이면 더욱 그렇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걸어도 걸어도>를 볼 때도 그랬다. 지난호에 정한석 기자가 상세한 형식주의 분석의 전형을 보여준 대로 이 영화도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자장권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건 고레에다 감독의 문제만은 아니다. 대중은 잘 몰라도 일본 영화감독 상당수는 오즈 야스지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아예 전통가옥에서는 찍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벗어나려고 의식하면 할수록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정한석의 <걸어도 걸어도>에 대한 분석은 재미있었지만 거기에 좀 다른 것을 첨언할 필요를 느낀다. 이 영화의 상당수는 집 안에서 등장인물이 나누는 대화장면으로 이뤄져 있다. 별다른 구경거리가 없는 집 안에서의 정경을 이렇게 희열 넘치게 찍어내는 것은 분명 상당한 영화적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컷이 바뀔 때마다 이런 수가 있었는가, 라고 감탄하는 순간이 몇 차례 있었다. 별것 아닌 듯해도 집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찍어나가며 장면 전환의 리듬과 함축을 맞춰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오즈는 그걸 다다미방의 앉은 시점 앵글로 맞춘, 인물과 사물의 정물화를 꾀하는 리듬으로 어떤 형식을 완성했다. 앞숏에서 인물을 잡았을 때와 똑같은 구도의 사이즈로 뒷숏에서의 인물을 이어 맞추는 오즈 영화의 편집은 인물의 감정선보다는 공간에 초점을 맞춘다. 처음엔 어색하지만 점차 별로 크지 않은 집 안의 공간이 주는 감정이입의 힘이 대단하게 된다. 인물숏도 공간과 사물을 다루는 숏과 동격으로 처리함으로써 그의 영화의 정서적 그릇이 더욱 커지게 된 것이다.

독창적이지만 누구나 따라할 수는 없다. 따라하는 순간 창의적인 비틀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건 오즈 영화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건 오즈식이로군, 하고 규정하고 싶을 것이다. <걸어도 걸어도>는 오즈 영화와 비슷한 구석은 있지만 다른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직각앵글과 뒷모습 숏이 주는 공포

일단, 오즈 영화처럼 완곡한 화법으로 감각의 전일성을 꾀한 끝에 오는 초월적 감흥을 <걸어도 걸어도>가 겨냥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장남의 기일에 부모 집에 차남과 딸 내외 가족이 오면서 벌어지는 이 영화의 내용은 실은 무시무시하다. 겉으로는 상냥하게 대하면서도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에 둘째아들과 며느리에 대해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며 딸과 대화하던 어머니는 초혼인 자기 아들에 비해 애가 딸린 미망인이었던 며느리에 대해 심상치 않게 험담을 한다. 딸은 엄마에게 그렇게 잔인한 말을 하느냐고 살짝 힐난하는데 영화 전체에 걸쳐 그런 순간들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가족이 중요하니 어쩌고 하는 말을 우리는 입에 발린 듯이 하지만 실제로 대다수 사람들이 살아가는 꼴을 들여다보면 대개 자질구레한 상처투성이다. <걸어도 걸어도>의 가족들은 모두 서로 섭섭한 감정을 갖고 있다. 이 가족의 어머니는 이 분야에서 단연 발군이다. 웃으며 가족들을 알뜰하게 챙겨주면서도 슬쩍 가슴속에 묻어둔 말을 적재적소에 꺼내 상대를 찌를 줄 안다. 죽은 아들의 묘에 성묘를 다녀오는 길에 어머니는 둘째아들 료타에게 아이를 낳을 생각은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고는 아이를 낳으면 헤어지기가 힘들지 않겠느냐고 한다. 이 말은 나중에라도 합가해서 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아들에게 가볍게 무시받은 뒤 그녀가 한 말이다. 동시에 저만치서 앞서가던 료타의 아내는 아들과 함께 사별한 전남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서정적인 음악이 깔리는 가운데 아름다운 가족적 풍경의 속내를 보여주는 이 영화의 방식은 줄곧 이런 식이다.

낮 동안 가족들이 전부 집 안에서 북적일 때 집 안 내부를 360도 축으로 놓고 180도선을 넘으며 역각으로 뒤집어 숏을 나누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연출은 몇 차례 결정적으로 잔인한 순간에 직각앵글로 화면을 나누는데 그때마다 가족은 곧 공포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부엌 탁자에서 뜨개질을 하던 엄마에게 둘째아들 료타가 슬며시 다가가 용돈을 드린다. 좋아하던 어머니에게 아들이 말한다. 첫째아들이 바다에 빠져 죽으며 구해준 청년이 매년 기일마다 집에 찾아오는 것은 이제 그만두게 하라고, 그가 괴로워하는 게 안쓰럽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를 오게 하는 것이라고 태연하게 대답한다. 그 순간 카메라는 부엌 싱크대 근처에 서 있는 아들과 그 앞 탁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어머니 사이의 직각에 위치해 어머니의 옆얼굴을 큰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그리고는 다시 아들의 시점에서 어머니의 뒷모습을 잡는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기댈 품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일상적 겉모습 뒤에 감춰진 또 다른 그녀의 그림자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정적 호소력이 강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왕년의 유행가 <블루 나이트 요코하마>를 레코드로 틀어놓고 어머니가 가족들 앞에서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는 장면도 실은 트로트 따위는 모른다고 했던 남편이 젊은 시절 바람 피운 기억을 간접적으로 회상하는 장치다. 또 다른 장면에서 료타의 아내인 새 며느리에게 오래된 옷가지를 챙겨줄 때도 어머니는 옷장 서랍을 향해 몸을 돌린 채 곧 며느리에게 뒷모습을 보인 채로 심상하게 잔인한 말을 한다. 이 뒷모습 숏의 충격이 중화되는 것은 둘째아들 료타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볼 때다. 이웃집에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 아버지는 도와줄 수 없으니 구급차를 부르라고 한다. 아버지가 자기 방에서 전화받고 있을 때 아들은 아버지의 방문을 바라본다. 다음 장면에서 구급차 요원들에게 의사 행세를 내려고 하는 아버지가 박대를 당하는 뒷모습을 아들이 지켜본다.

화해는 세월의 자각과 함께 온다

잔인하지만, 가족이 잠시 화해할 수 있을 때는 누군가가 약해진 것을, 세월을 따라 소모된 것을 깨달을 때뿐이다. 료타의 가족 중 연기가 가장 서투른 이는 아버지였다. 그는 다른 가족들에게 상처를 가장 많이 준 가부장이었을 테지만 자신도 서운한 게 많다는 걸 전시하며 어린애처럼 투덜거리는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런 것들이 다 꼴보기 싫지만 해진 육체가 드러날 때 용서 비슷한 감정도 생기는 것이다. 앞서 말한 장면에서 이어지는 것은 욕조 안에서 목욕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이다. 욕조 바깥에서 양치질을 하는 아들과 대화하면서 어머니는 여전히 날선 말을 하는데 그 와중에 틀니를 수도꼭지에 씻는다. 여기서 어머니의 뒷모습이 준 이전의 공포스런 감정은 중화된다.

영화의 후반부는 그때까지 무심하게 상황을 지켜본 료타의 아들을 축으로 재정립된다. 료타와 아들이 욕조 안에 앉아 함께 목욕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앵글은 이 영화에서 드물게 오즈의 영화에서처럼 수평적으로 그들을 배치해 보여준다. 그전까지 이런 화면은 없었다. 그들 사이에는 아직 상처가 오갈 만한 사연이 없었다. 그래서 앵글도 그렇게 깨끗하다. 모든 것을 함께 나란히 지켜볼 수 있다는 것처럼. <걸어도 걸어도>는 가족관계라는 것이 타자에 대한 배려의 최초의 장이면서 실은 은밀한 복수의 장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잔인한 통찰을 깔고 있다. 그런 감정이 불식되는 것은 우리가 마모되는 것을 자각할 때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너무 늦게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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