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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 선과 여백을 따라, 시상은 흐른다

터웨이 감독 수묵화 애니 컬렉션

1961, 1963, 1988년 감독 터웨이 상영시간 약 50분 화면포맷 1.33:1 스탠더드 음성포맷 DD 2.0 중국어 자막 한글 출시사 (주)유이케이 화질 ★★★ 음질 ★★★ 부록 ★★★☆

커다란 소의 등에 올라타 피리를 부는 소년.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사이 청아한 피리 소리가 울려퍼지고 한가로이 거닐던 소년과 소는 문득 수묵화 속 풍경이 되어 서서히 계곡 속으로 사라져간다. 꿈에서 깨어나니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알 수 없더라는 그 유명한 호접몽의 한 자락이라도 만나본 듯 인간과 소 그리고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몰아의 경지를 선사하는 작품, 1963년 상하이 애니메이션 필름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피리 부는 목동>은 중국의 전통 수묵화에서 유래한 맑은 그림체와 뛰어난 완성도로 중국 애니메이션의 존재를 전세계에 알린 작품이다. 이미 국내에도 여러 차례 소개된 고전 중의 고전이지만 최근의 DVD 출시 소식은 애니메이션 팬이라면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피리 부는 목동>의 총감독이자 상하이 애니메이션 필름 스튜디오의 초대 소장이었던 터웨이는 수묵화의 터치를 독자적인 기법으로 애니메이션에 적용시킨 장본인이다. 그가 ‘수묵화’라는 중국 전통 미술의 영역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당시 중국의 정치·문화적 변화와 관련이 있었다. 1953∼57년 실시됐던 중국 사회주의 건설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중국은 국가 경제·문화 건설에 박차를 가했고, 특히 영화 등 예술분야에서는 ‘민족적 품격을 찾아서’라는 구호처럼 그 소재를 전통문화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여기에 터웨이 개인의 욕망 역시 더해졌다. 당시 중국 애니메이션은 러시아 등 동유럽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중국 작품들은 종종 러시아 작품으로 오해받았다고 한다. 이에 터웨이는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가장 중국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었고 수묵애니메이션이라는 동양적이며 독특한 애니메이션 기법에 대한 고민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고안된 것이다.

이들의 첫 번째 수묵애니메이션은 1961년 올챙이들의 엄마개구리 찾아 삼만리를 그린 <엄마 찾는 올챙이들>이다. 중국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동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20세기 중국의 대표적인 화가 제백석(齊白石)의 화풍과 필치를 고스란히 옮겨놓고 있다. 맑은 물속을 꼬물꼬물 헤엄치며 엄마개구리를 찾아가는 올챙이떼의 모험과 개구리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을 화선지에 찍어낸 먹의 농도와 붓의 터치만으로 코믹하면서도 교육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피리 부는 목동>

먹으로 그린 개구리가 폴짝 뛰어오르는 장면으로 처음 시작된 수묵애니메이션은 1963년 <피리 부는 목동>에서 형식적, 미학적으로 완성된다. 어린 목동이 나무 위에서 잠을 자다 꿈을 꾸게 된다. 목동의 몸에서 또 다른 목동이 빠져나와 꿈속의 세계를 거닐게 되고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나뭇잎은 나비가 되고 나비들이 허공을 나른하게 날아다닌다. 목동이 피리를 부는 장면과 물이 흐르는 계곡의 이중인화, 영상과 음악의 완벽한 조화, 묵의 농담으로 표현되는 새, 나비 같은 생명의 모습 등 영화는 그 자체로 한편의 서정시를 보듯 아름다운 시상으로 가득하다. 특히 윤곽선을 그려넣고 그 안에 색을 칠해 넣어 피사체의 외부와 내부를 경계짓는 보통의 애니메이션과 달리 수묵애니메이션에는 선을 통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번 내달린 붓의 선이 나무, 산, 계곡이 되고, 나비가 되고, 소가 되는 수묵애니메이션에서 선은 안과 밖을 경계 짓는 대신 영화 속 모든 요소들을 하나로 어우러지게 한다.

이번에 출시된 DVD에는 이 두 작품 외에 4번째 수묵애니메이션이자 현재까지는 마지막 수묵애니메이션인 1988년작 <산수정> 등 총 3편의 단편과 20분가량의 다큐멘터리가 2장의 디스크에 담겨 있다. 그 화려함이야 최근의 애니메이션과 비할 수 없겠지만 수묵의 청아한 맛과 여백이 주는 공간미 그리고 아름다운 선의 흐름이 만들어낸 화면의 깊이와 서정성은 어쩌면 다른 영상매체에서는 불가능한, 애니메이션만이 가능한 무엇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