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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점프 컷] 미치광이같은, 기상천외한…

부천영화제에서 맛본 시네마틱한 쾌락, 호주B무비의 세계와 <이웃집 좀비>

<이웃집 좀비>

영화제에 가서 제일 좋은 것은 자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올해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 머문 짧은 며칠 동안 몇편의 영화가 내게 그런 기쁨을 주었다. 그에 관한 소회를 풀어보고자 한다. 마크 하틀리의 다큐멘터리 <헐리웃과 맞장뜨기: 호주 B무비의 세계>(원제 <Not Quite Hollywood>)는 1970년부터 시작된 호주의 장르영화 붐을 조망한 영화인데, 미지의 신세계를 총괄적으로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수많은 영화의 클립과 호주 영화인들의 인터뷰를 속도감있는 편집으로 구성했다. 이런 데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쿠엔틴 타란티노가 인터뷰이로 나와 장광설을 펴는 것도 흥미롭다. 영화 보는 기계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특정 영화의 장면을 언급하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이를테면 어떤 영화의 과도한 신체훼손 장면을 묘사하면서 그 정도까지 나갈 줄 누가 알았겠어요, 라고 흥분해서 외치는 것이다.

솔직히 이 다큐멘터리를 보기 전까진 필자도 호주 장르영화의 역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었다.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와 같은 작품이 영화 불모지 호주에서 나왔다는 것이 불가사의하다는 편견이 있었지만 이 다큐멘터리를 보니 그럴 만한 토양이 축적돼 있었던 것이다. 1970년대에 화장실 유머의 원조라 할 만한 저질 코미디영화 붐이 일어나고 그 방면의 유명 스타도 배출하면서 호주는 대중문화의 신흥 발원지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검열이 완화되면서 호주영화계는 저예산으로 관객을 도발하는 최적의 도구, 섹스와 폭력을 파는 다량의 B무비를 쏟아놓게 된다. 그런데 그 정도라는 것이 상상을 불허하는 수준인 모양이다. 발췌된 B무비들과 감독들의 인터뷰를 보면 이 오지의 땅에 로저 코먼 같은 인물이 수두룩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상업영화 최적 조건은 자본 아닌 자유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는 그런 흐름 속에서 나타난 영화이다. 이 영화를 비롯해 상당수의 B무비들이 미치광이의 태도가 아니면 만들어질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세상에 나왔다. <매드 맥스>에서 달리는 차를 거의 땅바닥에서 훑으며 따라가는 카메라 앵글은 종래에 스크린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이즈와 앵글로 액션영화의 속도감을 혁신시켰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생사를 건 스탭들의 모험이 있었다. 조지 밀러의 아이디어에 대해 스탭들은 모두 반대했다는데, 도대체 영화가 되기는 되나 지켜보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왕우의 출연작으로 장년층 관객에게도 친숙한 호주와 홍콩의 합작영화 <스카이 하이>(원제는 <홍콩에서 온 남자>)의 제작비화도 소개된다. 왕우는 거만한 미친 놈이고 촬영시 상대 배우들을 실제로 가격했으며 자동차 충돌장면을 촬영할 때 스턴트맨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안전장치 없이 찍었다는 식이다.

호러, 웨스턴, 코미디, 에로, 액션 분야에서 다종다기하게 뻗어간 이런 호주영화의 흐름에 대해 점잖은 평론가들은 이미 과거형인데도 여전히 불쾌감을 표하고 새로운 세대의 감독들은 열광하는 역사적 가치평가의 상대성을 이 다큐멘터리는 담고 있다. 호주영화의 이 질풍노도 시기에 정부의 지원으로 나타난 흐름이 우리가 영화 역사책에서 읽어 아는 호주 뉴웨이브다. 피터 위어나 질리언 암스트롱 등이 연출한 사극영화들이 국제적으로는 호주영화의 품위를 증명해주었다. 그 흐름과 병행해 호주 영화인들에게 돈을 벌어다준 것은 저예산 B장르무비들이었다. 물불 가리지 않고 표현의 한계수위를 깨트리며 전개된 이 흐름에서 느껴지는 미치광이 같은 도전정신은 압도적이다. 반면에 그렇게 좀더 총체적인 자극을 향해 나아간 창작자들의 시도가 과도한 덧칠로 점철된 매너리즘의 굴레에 빠져 침체하게 된 것도 필연적이다.

<헐리웃과 맞장뜨기: 호주 B무비의 세계>가 시사하는 것은 다른 매체와 공유되지 않는 영화의 고유한 매력이 장르 규범의 경계를 놓고 희롱하는 데서 온전히 발휘된다는 점이다. 도덕과 윤리에 아랑곳하지 않는 창작자들의 돈벌이를 향한, 동시에 안 해본 것을 하는 모험정신을 통한 맹렬한 노력이 놀라운 영화전통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산발적인 시도가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로 나타난 것이 호주 현대 영화역사의 흥미로운 점이다. 동시에 상업영화의 최적의 조건은 자본이 아니라 자유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안전한 자본의 뒷받침이 없는 상태에서 이 당시의 호주 영화인들은 다음 영화를 찍을 만큼의 돈이라도 벌기 위해 거듭 B무비를 찍었다.

싸게 찍었어도 싼 티가 전혀 나지 않네

그에 관해 한국에서도 놀랄 만한 사례가 되는 영화가 출현했다. 오영두, 류훈, 홍영근, 장윤정 등이 공동연출한 <이웃집 좀비>는 일종의 옴니버스 구성으로 이뤄졌는데, 굉장한 에너지로 가득찬 작품이다. 연출자들은 모두 선후배와 부부 등의 인연으로 묶인 관계이고 전부 1인3역 이상의 역할을 해내면서 이 영화를 2천만원의 예산으로 완성했다. 장편영화 예산으로는 터무니없는 이 제작비는 소규모 스탭과 배우의 자발적 희생을 바탕으로 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도 영화는 저예산의 티가 별로 나지 않는다. 아울러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즐기면서 만든 기운이 화면에 넘쳐서 보는 사람도 덩달아 거기에 빨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웃집 좀비’라는 제목처럼 이 영화는 서구 좀비영화의 전통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영화 속 좀비들은 일종의 생활형 좀비들이다. 좀비에 감염된 인간들을 제거하려는 정부의 압박에 맞서 살길을 도모하려고 애쓰는 존재들이다. 좀비가 된 엄마를 먹여살리기 위해 자기 살을 잘라 봉양하는 딸의 얘기나 정상으로 돌아온 뒤 어떻게든 재활하려고 애쓰다가 봉변을 당하는 전직 좀비의 애환 등이 묘사된다. 다양한 상황이 묘사되는데 대다수 장면은 이 영화의 공동연출자들인 오영두, 장윤정 부부의 옥탑집에서 촬영했다. 영화의 첫 에피소드에서 느닷없이 좀비가 된 주인공이 자기 살을 뜯어먹는 기상천외한 광경은 좁은 공간에서 박진감있게 전개된다. 좀비 남자와 정상인 여자가 애인으로 나오는 또 다른 에피소드에선 숫제 한방에서만 펼쳐지는데 사방의 감시를 뚫고 다른 곳으로 가느냐, 아님 그냥 방 안에서 죽느냐를 놓고 옥신각신하는 그네들의 고통을 그리는 가운데 감독의 범상치 않은 화면 사이즈 감각을 느낄 만 하다.

모든 것이 이런 식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역동적인 액션이 펼쳐지는 영화 말미의 에피소드에서 좀비를 퇴치하는 정부군과 좀비들의 싸움이 펼쳐지는 장소도 매우 한정돼 있다. 그런데도 화면의 제약을 별로 느낄 수 없다. 카메라와 편집기를 이용해 다양한 공간감각이 창조된다는 걸 보여주는 게 영화라는 걸 증명하는 듯 하다. 나는 솔직히 좀 놀랐다. 저예산 어쩌고 하는 영화들을 꽤 봐왔지만 이만큼 시네마틱한 쾌락을 분방하게 뿜어내는 영화는 처음이다. 감독들은 모두 10년 넘게 충무로에서 현장경험으로 버텨온 이들이다. 한국 상업영화의 미래는 이런 젊은이들의 기운을 어떻게 흡수하느냐에 달려 있다. 솔직히 지금 시스템이 그걸 해낼 것 같진 않다. 나는 차라리 <이웃집 좀비>의 창작자들이 앞으로도 좀더 자립적으로 뭔가 해내기를 바란다. 그게 가능할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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