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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택배 시대
2009-08-21

가끔 혼이 나간 듯 인터넷쇼핑을 할 때가 있다. 마감이 지나고 해이해진 마음으로 음주가무를 즐기다 숙취가 덜 가신 채로 출근한 오전이 가장 위험하다. 당장 해야 할 급한 일도 없고, 정신은 덜 돌아와 대책없이 긍정적인 기분이 됐을 때, 눈앞에 컴퓨터가 있는데 어쩌겠는가.

<팝툰> 8월호 마감이 지난 어느 날 오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어 가지 잡동사니에다 중고 만화책, 고양이 사료 등등 이미 대여섯건 결제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걸려오는 전화는 죄다 택배 아저씨. 보통 택배 관련 통화는 경비실에 맡겨달라고 하는 걸로 끝인데, 이번엔 웬일인지 특이한 분들이 많았다.

인상적인 분 베스트3를 뽑아봤다. 3등부터. ‘어떻게든 배달 완료형.’ “경비실에 맡겨주세요.” “경비 아저씨가 안 계시던데요. 근데 복도 창문이 열리더라고요.” “네에? 창문이 열려요?” “아, 그래서 그 사이로 던져 넣었어요.” 그날 밤 재활용품을 모아놓는 용도로 사용하는 작은방 쓰레기 더미에서 택배박스를 건져올렸다.

2등. ‘사생활 개입형.’ “지금 집에 없는데요, 경비실에….” “몇시에 와요?” 독립한 이래 귀가시간을 확인받기는 처음이었다.

1등. ‘난 이미 널 알고 있다.’ 낮엔 어차피 집에 아무도 없으니 사무실로 받는 게 낫겠다 싶어, 배송지를 바꿔봤다. 사무실을 잠시 비운 사이 부재중 전화가 와 있어 택배 아저씰까 싶어 전화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대뜸 주소를 묻기에 답했더니, “아, 그 만화책 보는 데요?” “네? 만화책이요?” “거기 사무실 가면 만날 일 안 하고 만화책만 보던데.” “아네… 만화책 만드는 회사예요.” “좋겠네. 옆자리에 맡겨놨어요.”

만날 만화책 보는 건 어떻게 아셨을까 궁금해했더니 옆자리 선배가 지역 담당자가 있어서 같은 구역을 매일 돈다고 가르쳐주었다. 이렇게 질러대다간 택배 아저씨랑 ‘베프’ 되겠네, 하다가 문득, 택배기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당 구역에 모종의 사건이 일어나고, 경찰은 단서를 찾지 못해 수사는 제자리걸음. 이때 정황을 눈치 챈 택배기사가 사건 해결에 나서게 되고… 팔, 다리, 가슴에 보호장구를 착용한 건장한 몸에, 오토바이를 타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범인을 쫓는 택배기사… (뜬금없이)주인공은 하정우가 좋겠다.

김송은/ <팝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