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와 <국가대표>가 여름 극장가를 사로잡았다면, 이제 본격적인 가을 시즌을 알리는 영화들이 포진한다. 한국영화는 엄마와 딸, 진부하지만 가장 특별한 관계를 다룬 <애자>와 1997년 이태원 햄버거가게에서 일어났던 살인사건을 재구성한 <이태원 살인사건>의 각축전이 펼쳐질 전망이다. 오랜만에 연기 변신하는 김영애의 풀 스토리는 ‘씨네인터뷰’를 통해서, 살인용의자로 기존 이미지와 180도 다른 연기를 소화해낸 장근석의 도전은 ‘커버스타’를 통해서 미리 만날 수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10주년 기념프로젝트 <황금시대>로 유쾌한 기분을 가져도 좋겠다. 이송희일, 김영남, 최익환, 윤성호, 양해훈 등 젊은 감독 10명을 통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짚어보는 단편 모음이다.
할리우드영화도 잔잔한 드라마로 가을 감성을 자극한다. 언니의 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가진 동생 ‘안나’의 당찬 아픈 자아 찾기 <마이 시스터즈 키퍼>가 가슴 먹먹한 드라마를 연출한다. <노트북>과 <알파독>을 연출한 닉 카사베츠 연출작으로 카메론 디아즈, 알렉 볼드윈 등이 출연한다. 센티멘털해지는 가을엔 역시 워킹 타이틀 작품만한 것이 없다. 충동적인 사랑을 소재로 한 <처음 본 그녀에게 프로포즈하기>는 <아메리칸 파이>의 제이슨 빅스가 출연한다. 배우만 보고 화장실 유머 기대했다간 실망하고 나올지 모른다. 좀더 독특한 영화를 즐기길 원한다면 산악스릴러 <하이레인>에 도전해봐도 좋겠다. 자연의 공포보단 인간 내면에 대한 성찰이 주가 되는 영화다. 신인 에로배우들에게 밀려난 에로배우 다해와 자해공갈단 백한근의 애환과 애정을 그린 <핑크 토끼>는 완성도에 대한 평가가 낮다. 그래도 다양한 장르와 형식의 영화가 풍성한 한주다.
이주의 대사
동팔 / 수술 안 받는다고 당장 죽는 거 아이다. 데리고 가라. 애자 / 1년이라도. 다믄 1년이라도 더 살게 해달란 말입니다. 동팔 / (한숨) 니는 와 그래 어멜 살리라 카노. 애자 / …엄마잖아요…. 영화 <애자> 중에서 애자와 엄마 친구이자 의사인 동팔의 대화.
막상 내 앞에 닥친 일이 되면 ‘보편’이 존재하지 않는다. <애자>는 늘 옆에 있을 것만 같았던 엄마, 그 엄마의 갑작스런 부재를 감당해야 하는 딸의 이야기다. 매일 ‘결혼해라’, ‘정신 차리고 살아라’ 닦달하는 엄마가 귀찮기만 해도, 그건 상대가 엄마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투정이다. 그 모든 잔소리가 자신을 위한 애정의 표현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은, 막상 엄마가 떠날 날을 얼마 앞두지 않고서다. 남들에겐 별 의미없는 한 자연인의 죽음이, 그래서 딸에게는 더 사무치고 가슴 아프다. 1년 만이라도, 힘든 수술과 병수발을 하더라도, 딱 1년 만이라도 더 엄마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딸. 그래서 지금까지 차마 닭살스러워서 하지 못했던 그 고마움과 애정을 보상해주고 싶은 딸의 마음이 이 작은 대사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