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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의 <아리랑>에서 영화의 힘 느껴, 배우가 되다- 윤봉춘(3)
2001-12-05

“사람 움직이는데, 선교보다 영화가 낫더라”

목재소에서 인부로 일주일을 일한 적이 있는데 하루는 거기서 쓰러졌어요. 의사의 말이 자기 가슴을 짚어봐라, 왼짝 가슴을 짚어보니까 파딱파딱 하거든요. “이게 심장인데 당신은 물이 잡혀서 심장이 점점 오른쪽으로 이사갔다”는 겁니다. 수술합니다. 큰 대야를 가지고 하는데, 숨을 들여쉬면 확확 나오는데 사람 속에 무슨 물이 한 대야를 넘어요. 대야를 또 바꿨습니다. 그 바람에 갈비뼈가 이렇게 들어가면서 귀도 약해지고.

크리스마스 날 예배당 가보니까 몸이 건강했거든요. 건강하니까는 봄부터는 축구를 했어요. 늑막염 앓는 사람이 축구가 다 뭐야. 기침이 나고 또 어떡해. 진찰하니까 늑막염이 재발했대요. 사형선고를 내려요. 하루 종일 하늘의 구름 보면서 죽는구나 생각하다 저녁 때 집에 들어갔어요. 어머니 보니깐 눈에 눈물이 있더라고. “낙심 마라. 믿음으로 고쳐야 한다. 교회 열심히 하고 운동하지 마라.” 근데 운동을 안 하고는 못 배기는 성질이거든.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운동장에 가서 테니스하고 공 굴리기 했습니다. 병이 나았느냐 들었느냐 묻지 않고 그저 이틀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약 받아 가지고 먹고 그랬습니다. 한번 갔더니 이제는 오지 않아도 좋다, 다 나았다는 거야.

지금까지 얘기는 내가 나운규 편지를 받고 영화계에 진입하게 되는 전치사. 전치사치곤 좀 길다.(웃음)

두만강을 건너며 부른 이별노래

몇달 후인가 됐는데 아버지 보고 얘길 했습니다. 영고탑(寧古塔, 중국 동북 지방 헤이룽성(省) 남동부에 있는 닝안(寧安)의 옛 이름- 필자)이라는, 그 시절에 독립군 집결지가 있었습니다, 그리로 간다고 돈 달라고 하니까 어머니가 어디 가서 돈을 가져온다는 게 50전인가. 그날 저녁에 마리아를 짝사랑하던 헌병이 찾아와서 나를 부르는 겁니다.(윤마리아는 회령 제일의 미녀로 소문난 여학생인데, 나운규가 윤봉춘을 시켜 마리아에게 연애편지를 전달하곤 했다. 그러나 마리아를 좋아하던 헌병의 압력으로 나운규는 무기정학을 당했고 곧바로 간도로 떠났다. 16살인 1918년의 일로 이때부터 영화에 입문하는 1924년까지 나운규의 젊은 시절은 유랑과 투옥으로 점철되었다. 나운규의 작품에 방랑자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필자)

윤군! 윤군! 악질스러운 목소리거든. “쫌 물어볼 게 있네.” 헌병대로 가자는 겁니다. “근데 제가 지금 저녁예배를 안 봤는데 예배 보고 곧 가겠습니다.” 그래 예배를 받나요? 핑계죠. 목사님 댁에 가서 자고 그날 영고에 들어가는데 남은 게 20전이야. 가는 도중에 용정에, 제2의 한국입니다, 주말마다 거기에서 놀았기 때문에 아는 친구들도 있고 그래서, 친구를 찾아갔죠. 근데 친구를 만나지 못했어요. 팥죽 한 그릇 10전이에요. 이제 10전 남았습니다. 그때는 가다가 동장이나 이장이나 봐서 얘길 하면 하룻밤 재워주고 또 어지간한 사람은 여비도 좀 보태주고, 인심이 궁하지 않았어요. 영고탑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가 윤봉춘! 윤봉춘! 하면서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구. 그래서 돌아다보니까 친한 사람이야. 김명봉이라는 사람인데 내가 독립군에 있을 때에 알았죠.

이 사람은 한국사람으로 로서아(러시아)에서 난 사람입니다. 2세죠. 이 사람이 거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맡고 군인으로 들어갔다가 볼세비끼들이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백군으로 겨서 웅진으로 나진으로 왔으니, 그러니까 멘세베끼죠. 그땐 참 고급 장교들도 나오고 미인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이것들이 청진 원산 서울 가서 모두 창녀노릇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우리가 용정서 연극할 때 러시아 여자 하룻밤 무대 등장시키는데 10전. 풍속회라고 만들어 가지고 풍속회 회장이 거기서 병원을 차리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러시아 사람들은 그 병원에 가 고칩니다. 한국에서도 불치의 병이 있다 그러면 거기 가서 고칩니다. 김명봉이 그 병원의 통행관이었는데 한국말이 아주 서툴러요.

근데 내가 밥도 안 먹고 자면서 기침을 자꾸 하니까 그 이튿날 아침에 조반을 먹고 병원을 데려갔어요. 김명봉이가 의사하고 통역하는데 “내 신세나 당신의 신세나 마찬가집니다. 나도 조국을 위한 망명객이고 당신도 조국을 위한 망명객입니다. 당신이 지금 영고탑으로 간다 그러니 가는 길 막지는 않으나 당신의 몸에 병이 있는 듯하다고 하니 드러누우쇼.”

눈물나더라고. 난 무료로 병치료 하고. 그러다가 영고탑 가는 거 포기되고. 예우회라는 극단을 맨들었어요. 연극을 할 때 마루시아라고 하는 러시아 장교 딸하고 친했어요. 뜻이 맞았어요. 살자 그랬습니다. 나는 결혼하는 거 미국사람, 동구사람 이런 것도 그때부터 초월한 것 같아요. 이 여자하고 두만강을 건널까 했는데 외국사람 들어오면 지참금이 있어야 돼. 이 여자한테도 돈이 없었고 나한테도 돈이 없었으니까 할 수 없어서 두만강변에서 이별의 곡을 불렀습니다. 그것이 아마 1926년 이른 봄인 것 같습니다.

“나도 서울가면 영화배우가 될 수 있느냐”

그래서 운규가 영화계에 들어간 걸 알았고. 26년 겨울에 운규가 편지 하고 해동에 찾아왔어요. 올 때 <아리랑>(1926), <풍운아>(1926)를 가지고 왔습니다. 만년좌 극장 문 앞에다가 솔나무 가지로 아치를 해서 광고를 대대적으로 했죠. <풍운아>는 새겨보지 않으면 아주 방탕한 작품같이 보입니다. 교인들이 중간에 보다가 다 나가버렸어요. 그런데 그 이튿날 <아리랑>은 첨부터 마지막까지 관객이 발을 구르고 박수를 하고 대환영. 그때 해설자가 우정식인데 <풍운아>를 해설하다가 잘못한다고 도중에 얻어맞았습니다. 운규가 그렇게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에요.

그날 공연이 끝난 후에 운규하고 만났습니다. “니 영화를 보니까 대단히 좋다. <풍운아>는 볼 거 없는데 <아리랑>은 보니까 대단히 좋다. 나는 거에서 무엇을 느꼈는고 하니 백리 이백리 길을 찾아 댕겨야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선교를 한다. 그렇게 괴로운데 영화 보니까 그림자만 돌아 댕기면 할말 다한다. 그러니 얼마나 영화가 좋아. 나도 서울 가면 영화배우가 될 수 있느냐.” 문제없다는 거야. “서울 가서 영화계 관계해보니까 맨 미숙한 사람들이다. 너도 오면 된다.” 그러곤 서울 올라가서 연락이 와요. 올라갔죠.

(“그 전에 나운규는 영화에 대한 제반적인 공부를 그때 했었나요?”- 대담중의 이영일) <명금> <철로의 백장미> 이런 작품들이 연속극으로 왔거든요. 운규하고 영화관 가면 나는 영화를 겉에서 보기만 하는데 운규는 노트를 가지고 와서 일일이 기록을 합니다. 전부 그림을 그려 가지고 구경하고 집에 와서는 해설을 합니다. 그게 공부라면 공부죠. 그 이듬해에 1927년 3월에 운규가 서울 오라고 전보가 왔어요.

서울 올라올 때 양복 입고 털 깃모자 쓰고 대륙잡지 한권 들고 왔어요. 서울역에 운규가 나온다 그랬는데 없어요. 대략 지리는 알지만 어림잡고 남대문을 거반 지나오는데 저 아래서 운규 특수한 뜀뛰기!

거기서 만나서 조선키네마에 찾아갔는데. 이것은 요도(淀)라고 하는 일본사람이 사장인데 거기 배우로 신일선, 이경선, 이금용이 있었고, 카메라맨으로 이명우가 있었습니다. 저녁에 운규가 시나리오를 하나 주면서 “내일 아침 촬영이다. 시나리오 보고 분장연습을 해라. 회령 있을 때 우리와 같이 연극도 하고 그랬으니까 분장도 할 줄 알 것이다. 배우 성격도 니가 설정할 것이다.” 그러구 거울과 시나리오를 주고는 나갔어요. 밤새도록 읽고 분장을 해봤습니다.

데뷔작 연기 호평받아

그거는 서울 변두리에 사는 중산계급의 부잡니다.(“그게 <들쥐>(1927)였죠?”- 대담중의 이영일) 이웃에 사는 신일선이라고 하는 예쁜 여학생한테 반해서 신일선의 망나니 오빠를 돈으로 매수해 가지고 신일선이를 샀습니다. 결혼을 하는데, 동네에 가면 ‘돈 한푼 줍쇼’ 하는 거지떼가 있는데 별명이 들쥐야. 들쥐와 같이 집도 없고 얻어서 먹는다 그래서 들쥐라고. 그 들쥐의 두목이 나운규. 근데 신일선이라는 여자는 학교에 가다가도 들쥐를 만나기만 하면 학비, 연필 살 돈이라도 주고 아주 친절했어요. 들쥐한테 환심을 얻고 있는데 결혼식 날 신일선이가 가마에서 울고 가는 걸 보고 들쥐들이 포위해 가지고 못된 영감을 쫓아버리고는 주삼손이라 하는 옹과 결혼식을 시켜준다. 이런 스토리거든요.(<들쥐>는 일제와 식민지 조선의 관계를 암시하는 작품으로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전편 상영금지처분을 받았다.- 필자)

근데 수염을 붙여도 악한 같지 않고, 밤새도록 10여 차례 분장을 썼다 지웠다 했습니다. 그 이튿날 오후에 왕십리 가서 로케를 했는데요, 거기서부터 제가 난생 처음 카메라 앞에 섰죠. 맨 처음에 카메라가 바스트로 들어옵니다. 첫 카트엔 에누지(NG)를 먹었습니다. 카메라 앵글을 몰랐습니다. 근데 <들쥐> 시사회 때 신문 기자들이 신문 평에다가 ‘이 사람은 과거에 출연한 연기자와 같이 느껴진다’. 그렇게 첫 작품에 호평을 받았어요.

정리 안선주/ 중앙대학교 영화과·이영일 출판프로젝트 연구원 babtong80@hanmail.net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