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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정안인(正眼人) 여러분
주성철 2010-01-08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24>

지지난주 인터뷰했던 시각장애인 임덕윤 감독에 대한 얘기를 더 하려 한다. 꼭 좀 다 실어달라고 부탁했던 걸 지면 관계상 왕창 덜어낼 수밖에 없었던데다, 그럼에도 인터뷰 당시 감독님을 속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 때문이다. 지면은 불과 한 페이지에 불과한데 “2박3일 동안 쉬지 않고 할 얘기들이 너무 많다”고 한 임 감독은 인터뷰 내내 “제가 너무 말이 많죠? 눈이 안 보여서 눈치가 없어요”라는 말을 거침없이 웃으며 내뱉던 달변가였다. 게다가 얘기를 다 타이핑하는데 노트북 배터리도 모자랄 정도였다. 한번 충전하면 3시간 정도 끄떡없이 쓰는 노트북이건만 그 얘기를 차마 끊을 수가 없어, 나중에는 배터리가 다 나갔는데도 꺼진 노트북을 타이핑하는 척 감독님을 속이고 말았다. 그래도 그 가운데 중요한 얘기들은 다 받아썼으니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노여워하지 마시길.

꼭 해달라는 얘기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정안인(正眼人)들의 대처법에 관한 것이었다(시각장애가 없는 사람들을 정안인이라 지칭하는데, 시각장애인과 정안인 사이의 다른 점은 단지 시력의 차이일 뿐인데도 정상인과 장애인으로 구별해 부르는 게 잘못됐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가 연출한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24> 초반부에는 시각장애인인 그를 무턱대고 잡아서 도와주려는 한 사람에게 ‘인기척을 내고 도와달라’는 부탁을 한다. 한국 사람들은 정이 많아서 그런지 시각장애인을 보면 도와주려고 일단 붙잡고 보는데, 불쑥 내민 손길이 장애인 당사자에게는 오히려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거다. 영화에서는 그 정안인의 손길이 뱀 모양의 CG로 표현된다. 사실 본 영화와는 썩 관계없는 장면인데도 꼭 넣으려고 했단다. 자신의 영화를 본 관객 한분이라도 시각장애인을 도울 때 꼭 인기척을 하고 도움을 주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는 거다. 사실 그런 장면을 넣는 게 영화적 완성도를 떨어뜨릴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런 일반인의 대처법이 얼마나 널리 퍼지길 원했으면 꼭 넣으려고 했겠나”라며 웃었다.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24>가 시각장애인이 직접 만든 영화라면, 2010년 1월 개봉하는 옴니버스영화 <사사건건>에 포함된 <산책가?>는 정안인 감독이 시각장애인의 시선으로 만든 작품이다. <산책가?>는 올해 본 수많은 한국 단편영화들을 통틀어 최고였다고 말할 수 있다. 몸은 건강하지만 시각장애인인 소년이 눈은 볼 수 있어도 움직이지 못하고 병원에 누워 있는 누나를 산책시켜주기 위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촉지도를 만들어 함께 산책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둘이 함께 걷는 산책로가 소년의 심상으로 보여지는 장면들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게다가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들로 세상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이전까지 별로 생각해보지 못했던 놀라운 예술적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누가 나에게 올해 본 가장 좋았던 단편을 꼽으라면 공교롭게도 시각장애인을 다룬 저 두편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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