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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 팜> LA 촬영현장
2001-12-12

대한민국 나성시, 사랑을 찾아 내가 왔다!

미국 도심엔 테러 이후에 성조기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아닌게아니라 LA 시가지에는 한집 걸러 한집마다 성조기가 내걸려 있고, 오가는 자동차에도 소형 국기가 매달려 펄럭이고 있다. 국기가 히트상품이 될 수 있는 그런 나라, 그런 도시 한복판에서 갑자기 성조기의 물결이 뚝 끊겨버린다. 70년대풍의 한국 상점들이 줄지어 서 있는 웨스턴 애비뉴의 한인타운. 뉴스보다는 한국의 드라마가 더 큰 영향력을 끼치는 곳, 100만명에 가까운 한국 교민이 모여 산다는 이곳은, 미국도 한국도 아닌 ‘제3지대’, 바로 ‘대한민국 나성시’다. 그 하늘 아래로 드리워진 것은 극우주의도 민족주의도 아닌, 100만 가지 사연, 100만 가지 꿈이다.

그중에는 대학 입시에 실패해 먼길을 떠나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랑을 위해 바다를 건넌 이도 있을 것이며, 실패와 좌절 끝에 절박하게 도피해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미국 땅에서 나고 자란 이들도 있을 것이다. 육상효 감독이 LA에서 촬영하고 있는 영화 <아이언 팜>은 바로 미국사회의 다양한 한국인들, 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LA라는 공간의 느낌을 잘 살려보고 싶었다. 이방인이 바라보는 LA의 모습, 한국과 다른 풍경들, 사람들의 관계 같은 것들.”

다양한 인종이 어우러져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도시 LA의 풍광이 또다른 주인공인 영화인지라 지난 11월 중순부터 한인타운을 중심으로 LA에서 올로케로 촬영하고 있다. 전체 촬영은 27회 예정이고, 현재 12회 정도 진행된 상태. <아이언 팜>은 미국으로 떠나온 애인 지니(김윤진)를 찾아 무작정 LA행 비행기를 탄 남자 아이언 팜(차인표)이 연적인 재미사업가 애드머럴(찰스 천)로부터 지니의 맘을 되돌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같은 캐릭터 코미디로, 캐릭터의 진지함과 상황의 아이러니가 잦은 웃음을 자아낸다. 단편 <슬픈 열대>나 <터틀넥 스웨터>와도 다른 색깔의 영화.

12월3일 자정, <아이언 팜>의 촬영현장을 찾았다. 인적이 끊긴 LA의 밤거리를 내달려 버뱅크지역의 대로변에 위치한 ‘위스키 밴드’라는 바에 도착했다. 이곳은 소주바 운영의 꿈을 안고 바텐더로 일하고 있는 여주인공 지니의 공간. 미국에서 고용된 현지 스탭 50여명 사이로 육상효 감독, 주연배우 차인표, 김윤진 등 ‘소수의’ 한국인들이 바쁘게 오가는 현장의 풍경이 이채롭다. 미국의 인디 프로덕션 MLP가 <아이언 팜>의 현지 스탭을 꾸리고 운용하는 등 미국 현지 제작진행을 맡고 있는데, 주요 스탭은 육상효 감독의 오디션을 통과한 이들이다. 현장관리와 진행을 전문 조감독이 전담하는 방식이나 정해진 시간 안에 계획된 분량의 촬영을 ‘에누리 없이’ 마쳐야 하는, ‘합리주의’에 입각한 현장원칙도 사뭇 낯설다. 이를테면 전문 조감독은 마지막에서 두 번째 촬영을 ‘애비’로, 마지막 촬영을 ‘마티니’로 부르는데, 스탭들에게 그렇게 공표되고 나면, 그 이상의 촬영은 불가능하다. 육상효 감독은 이런 제작방식을 농담삼아 “감독이 혹사당하는 구조”라 부르며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아이언 팜>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지 스탭들로 꾸려진 최초의 영화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이틀 밤 동안 현장을 엿본 결과, 감독과 프로듀서, 배우들은 현지 스탭들과 잘 융화하는 듯 보였다. 주인공 아이언 팜의 연적인 애드머럴 역을 맡고 있는 재미연기자 찰스 천은 “한국문화와 미국문화가 어우러져 있는 시나리오처럼 현장의 분위기도 흥미진진하다”고 귀띔했다. 한국 배우들에게 이번 기회는 한층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지난 2년 동안 <아이언 팜>을 기다려온 차인표씨는 LA가 ‘제2의 부산’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영화 찍기에 좋은 조건을 두루 갖췄다는 것. 할리우드 현지에서의 작업인지라 배우들에게는 할리우드 진출의 가능성도 열려 있는 셈이다. 물론 하기 나름이다. 김윤진씨는 “오우삼이 주윤발을 데려온 걸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주윤발 혼자 힘으로 진출한 것”이라며, 배우 개인의 노력이 절실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잠시 ‘재미영화인’이 된 육상효 감독의 미국행에는 ‘아이언 팜’ 못지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스포츠지 연예부 기자에서 시나리오 작가(대표작 <장미빛 인생>)로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던 그가 영화감독으로 선회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로맨틱코미디 <연애편지>로 연출 데뷔를 준비할 때 제작사가 크랭크인 전날 부도를 냈고, 마침 멤피스트에 선발되면서 미국 유학 기회를 잡았다. 칼아츠에서 USC로 적을 옮기면서, 수업 과제로 진행하던 <아이언 팜>의 시나리오가 좋은 반응을 얻자, 시네와이즈의 홍지용 PD와 함께 장편 기획을 시작했지만 투자와 캐스팅문제로 크랭크인이 지연됐다. <아이언 팜>을 품은 2년 동안 육상효 감독은 혹시나 하는 비장함으로 다른 대안을 준비하고 있었고, 미국 스탭들에게 개런티를 지불하던 날엔 라인프로듀서인 아내 이윤정씨와 더불어 밤잠을 설쳤다고 고백했다. 현장에서 그는 외로워 보였지만, 그만큼 단단해 보였다. 영화계의 재담꾼 육상효 감독의 ‘LA 보고서’에 기대가 실리는 것은, 먼길을 돌아온 그의 지난날이 결코 허튼 시간이 아니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육상효 감독 인터뷰

“스탭과 배우, 모두 적이라고 생각한다”

스토리와 캐릭터가 매우 독특하다. 어떻게 착안했나.

실화에서 힌트를 얻었다. 전에 살던 아파트에 그런 삼각 커플이 있었다. 어떤 여자가 혼자 살았는데, 낮에 찾아오는 남자와 밤에 찾아오는 남자가 달랐다. 그걸 토대로 학교에서 시나리오를 썼는데, 반응이 좋았다. 인간의 약점을 희극화하는 데 뛰어나다는 칭찬도 들었다. 그들이 어떻게 됐냐고? 잘 모른다. 애 교육상 안 좋은 것 같아서, 다른 데로 이사갔으니까. (웃음)

<슬픈 열대>는 풍자코미디였는데 이번엔 캐릭터코미디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내 동년배들이 넘지 못하는 벽이 있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아직도 집단적인 사고에 매여 있다는 것이다. 집단적이거나 풍자적이지 않은 캐릭터코미디, 재미있는 사랑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이 중요한 동기다. 미학은 강하지 않지만, 괜찮은 대중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캐릭터가 중요한 만큼 연기톤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처음엔 각자의 개성을 과장하려고 했다. 그런데 배우들이 불편해하더라. 지금은 서로 맞춰가면서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캐리커처의 느낌도 자연스럽게 누그러지더라. 배우들에게 강조하는 게 있다면, ‘우스꽝스런 진지함’(absurd seriousness) 정도.

캐스팅은 만족스럽나. 시나리오 단계부터 차인표씨를 염두에 뒀다는데.

논리적이지 않지만 감수성이 뛰어난 배우와 논리적으로 방향을 정하고 맞춰나가는 배우가 있는데, 차인표씨는 후자다. 그의 경직성을 코믹한 컨텍스트 안에 끌어들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차인표씨 연기에 만족하고 있다. 김윤진씨도 전사 이미지를 깨길 바랐고. 박광정씨는 너무 맞는 역할이라 매너리즘이 우려됐지만 잘 정리하고 있다.

할리우드 현지 스탭들과 작업하면서 느끼는 바가 있다면.

계산되지 않은 ‘창의성’(creativity)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촬영을 마치고 나면 이런저런 후회가 든다. 스탭들이 결정의 순간엔 나만 쳐다보는데 나를 믿어서가 아니라 책임을 안 지려는 거다. 사전에 준비하고 공감해도 막상 찍을 때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다. 조감독은 어떻게든 시간 안에 끝내자고 재촉하고. 촬영 첫날 일부 스탭들과 제대로 소통되지 않아 촬영에 차질이 생겼고, 위기의식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계획된 한도 내에서는 효율적으로 진행된다는 장점도 있다. 계획된 범위 안에서는 여기 스탭들 역시 심한 노동도 감내한다.

이 작품을 연출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스탭과 배우, 모두 적이라고 생각한다. 창의성의 적들. 그 적들을 어떻게 물리치느냐가 관건이다. 내가 생각한 비주얼 컨셉들, 코믹 타이밍, 대사의 말맛 같은 것들을 잃지 않으려 한다. 섬세한 편집이 중요할 텐데 그 과정에서도 엄청난 전투가 예상된다. LA=박은영 cinepar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