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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키네마사를 탈퇴하고 ‘나운규프로덕션’ 간판을 걸다- 윤봉춘 4
2001-12-12

“반발적인 민족심리 업고 <사랑을 찾아서> 대박 터뜨렸지”

‘조선키네마사’(1926년 서울에서 일본인 요도에 의해 창립. 2년간 <아리랑>을 포함한 6편을 제작하여 초기 한국영화사에서 비중이 큰 프로덕션이다.- 필자)에서 <아리랑>(1926), <풍운아>(1926), <들쥐>(1927), 네 번째 작품으로 <금붕어>(1927)를 맨들었지. 역시 나운규 원작·각색·감독·주연이고. <금붕어>를 맨든 다음 창신동에 ‘나운규프로덕션’(1927)이 됐습니다.

고 얘길 하기 전에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될 것이 여기 있습니다. <아리랑> <들쥐> <금붕어> 요 세 작품을 본다고 하면 이것은 레지스탕스, 확실히 항거하는 작품입니다. 운규가 처음에 <운영전>(1925)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는데요(1924년 부산에서 일본인 실업가들이 만들었던 한국 최초의 영화제작사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시절의 일. 여기서 나운규는 가마꾼 역의 엑스트라로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필자). 하루는 사장이 이채전(여배우- 필자)이 손목을 끌고 자꾸 방으로 들어가고 채전이 싫다고 울고. 운규가 그걸 보고 다짜고짜 들어가서 걸상으로 그놈 골통을 깠습니다. 그러고 튀어나오니까 윤백남(<운영전>의 감독)이 “장하다, 우리 여기 있을 것 없이 탈퇴해가지고 서울 올라가자”, ‘윤백남프로덕션’을 맨들었습니다(‘순 조선영화의 제작’을 기치로 내걸고 1925년에 창립- 필자 ). 이 얘기를 왜 하는고 하니, 나운규가 확실히 자기 가지고 있는 철학과 사상을 스크린에다가 표현을 했다는 거죠. 나운규프로덕션 창립작 <잘 있거라> 흥행

제가 조선키네마사에 입사해가지고는 젤 병아리니깐요. 시키지 않아도 일찍 일어나서 마당 쓸고, 유리창 닦고 그럽니다. 그런데 쓰무라라고 하는 일본감독, 사장의 처남이죠, 이 사람이 하루는 나더러 지금으로 치면 화대를 갖다 주라 그래요. 그래서 다른 심부름은 다 해도 이 심부름은 안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화를 내요. 싸움이 생겼습니다. 그날 저녁에 운규하고 나하고 남산 올라갔습니다. 우리가 맨들면서 이렇게 설움을 받을 것이 없지 않느냐. 나운규라는 간판만 가지고도 살 수 있다 말야. 나가자. 이게 조선키네마사 탈퇴한 동기입니다. 그래서 운규가 단성사 박승필씨한테 차기 작품 대주겠느냐 물어봤더니 아주 환영하고 쾌히 승낙을 해서 그때 ‘나운규프로덕션’ 간판을 걸었습니다. 나운규프로덕션 제1회 작품이 <잘 있거라>(1927)입니다. 아주 성공을 했습니다.

(“윤 선생님은 연기자로서 먼저 데뷔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감독을 하시기 전까지 마음에 맞는 역할 연기는 어느 작품에서 하셨는지요?”- 대담 중의 이영일) <사랑을 찾아서>(1928, 감독 나운규)의 사냥꾼 역할이 좀 마음에 들었고요. 그 후에 <승방비곡>(1930, 감독 이구영), 자기 누이동생의 원수를 복수하는 노동자 역입니다. 남들도 연기가 좋았다 이렇게 생각을 했고요. 나운규 작품 마지막으로 <오몽녀>(1937), 이건 토키로 됐는데, 오몽녀의 의붓아버지 봉사로 나왔습니다. 그때 신문에도 그랬고, 내가 볼 때도 연기가 괜찮았습니다.

<잘 있거라>가 굉장한 수입을 보고, 그 다음에 <옥녀>(1928, 감독 나운규)는 제가 출연하지 않았습니다. 시나리오도 잘 모릅니다. 그러고나서 나도향 작품 <벙어리 삼룡이>(1929) 맨들었습니다. 문예적 가치도 있었고 평은 좋았는데 큰 수입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 무렵을 통틀어서 문예적인 가치가 있는 작품의 흥행이 비교적 안 되지 않았습니까?”- 대담 중의 이영일) 그랬지요.

“애인 몇이나 됩니까?” “3천만입니다”

<벙어리 삼룡이> 실패한 다음에 운규는 화가 났습니다. 작품에 대한 야심이 만만한 사람이 서울 장안에 다른 키네마사가 여기저기 나와가지고 한참 경쟁하는 판에 자기가 연거푸 두 작품을 실패했거든. 복수할 작품을 하나 해야 되겠다 해서 된 것이 <두만강을 건너서>(1928). 시나리오를 써가지고 박승필씨를 찾아갔습니다. “두 작품씩이나 손해를 봬드려서 미안한데 이 작품은 하기만 하면 히트가 됩니다.” 몇번 사정했는데 실패했습니다. 조선키네마사 요도가 자금을 대기로 했는데, 그때 박승필씨가 뒷돈을 대줬으면 확실히 거금을 벌 뻔했죠. 첫날부터 극장이 터지기 시작하는데.

영화의 맨 처음에 나팔 크로스업이 나옵니다. 카메라가 훑어가게 되면 늙은 영감이 나팔을 불고, 고물상하는 사람이 돈을 들고 서 있습니다. 자막이 나와요. “영감, 지금 두만강을 건너간다면서 다른 건 다 파는데 나팔은 가지고 가 뭘 해? 나팔도 팔고 가쇼.” 그때 나팔수 이금용이가 말하기를 “그건 자네가 모르는 소리야. 내가 젊었을 때에 군대 신호도 하고 했던 나팔이야. 내가 어떻게 팔겠나?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나팔을 가지고 갈란다.” 검열 들어갔더니 이거 뭘 말하는 거냐 그러면서 가위질, 제목이 불온하다, 그래서 <사랑을 찾아서>가 된 겁니다.

검열의 난관 거쳐서 나왔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졌습니다. 반발적인 민족심리로 흥행도 잘됐고 사진 내용도 좋았구요. 쪽박을 차고 늙은 내외가 북간도로 들어가면서 늙은 포수, 윤봉춘, 애인을 찾아가는 여자 전옥, 부모를 길에서 잃어버린 어린 고아가 방랑아 나운규를 만납니다. 두만강을 건넜지만 거기 역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마적떼가 습격을 들어옵니다. 마적이라는 것은 왜놈의 상징이죠.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다가 눈보라가 치는 날 두만강 가운데서, 마적떼하고 한바탕 대전쟁이 벌어집니다. 운규하고 나하고 중심인물인데 서로 형이 되겠다고, 나이 동갑이란 말야. 그래서 짱껨뽕으로 운규가 형이 되고 내 가 동생이 되죠. 운규는 피스톨을 가지고 나는 장총을 가지고 싸우다가 나는 죽고 나팔수 노인도 총을 맞아서 쓰러집니다. 운규가 나팔을 대신 받아가지고 쓰러진 나팔수를 어깨에 둘러메고 눈보라 속에서 한없이 얼음짱을 타고 간다. 갈 데 없죠. 그러니까 얼음 위에서 그냥 쓰러진 거죠.

<사랑을 찾아서> 끝나고 나운규프로덕션이 해산 지경에 이릅니다. 다음에 <사나이>(1928, 홍개명 감독) 얘기를 하겠습니다. 민족을 위해 일하는 젊은 사나이 나운규에게 유신방이가 사랑을 요구합니다. “당신 애인 있습니까?” “있습니다.” 여자는 실망을 합니다. “애인 몇이나 됩니까?” “3천만입니다.” 그때 여자가 깨닫습니다. “아하.” 여기서 오히려 여자가 남자를 사모하는 맘도 커집니다. 근데 영화는 좋지 않게 됐어요. 유신방이라는 여자가 어렸을 때부터 권번에서 공부하고, 한문이 유식합니다. 가야금 명창, 바둑 명수, 사군자 잘하고요. 그러다가 운규를 만나 연애가 성립이 되는데요. 아주 이 여자도 운규한테 녹아버렸고 운규도 녹아버렸는데, 깊이 빠져노니까 작품이 이모냥 됐습니다. 작품이 실패를 보기 때문에 모두 굶주리게 됐죠. 그럴 때에 임수호라는 흥행사가 시골로 순회를 하자고 해서 개성 들러가지고 평양으로 올라갔습니다. 돈 굉장히 벌었습니다. 대구에서는 만경관 기둥이 무너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3개월 순회를 했나. 그때 회계를 누가 보았는고 하니 나운규 형(나시규- 필자)이 같이 댕기면서 회계를 봤습니다. 호남선 어디선가 밤에 자다 말고 옆방에서 형제간에 싸우는 소리가 났습니다. 형이 운규한테 대고 막 욕을 하고. 돈은 많이 벌었는데 한푼도 없대요. 운규는 도대체가 돈은 모르는 사람이니까. 참 철부지 장난처럼 이렇게 일을 잘 저지릅니다.

영화출연하며 <큰 무덤> 연출

서울 올라왔습니다. 운규 부인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니까 문짝이 다 떨어졌어요. 집세를 안 낸다고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가니까 집주인이 문짝을 떼갔어요. 이것은 나운규의 험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운규의 단점이라면 단점일까. 그런 걸 뭐 이기주의도 아니고 데카당도 아니고, 그날에 사는 예술인이라 할까요? 그러면서도 하나의 철학과 인생관은 가지고 뚜렷하게 살아간단 말야. (“철학이나 인생이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풀 길이 없어서 그렇게.”- 대담중의 이영일) 그랬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그 자리에서 운규와 결별했습니다. 운규는 그때 아무도 몰래 일본 가서 1년 만에 왔습니다. 나는 그동안에 <승방비곡> <도적놈>에 출연했고 대구에 내려가서 엑스키네마 <큰 무덤>(1931) 맨들어논 게 있었습니다. (“윤 선생님이 비로소 감독을 하시게 된 거죠?”- 대담 중의 이영일)

운규가 일본서 건너와서 나하고 처음 같이 한 작품이 <개화당이문>(1932). 상당히 성과가 좋았습니다. 운규가 그때 생활도 곤란하고 작품도 맨들어지지 않고 해서 한동안은 아까 얘기한 일본인 요도라는 사람이 악극단 맨들어가지고 지방순회하는데 거기 출연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지방순회하면서 로케 중심으로 맨든 작품이 <무화과>(1935), <그림자>(1935)입니다. <그림자>라고 이건 아주 탐정극처럼 돼 있거든요. 스릴이 있어서 작품이 훨씬 좋았습니다. 고담에 <노래하는 시절>(1930, 감독 안종화), <수일과 순애>(1931, 감독 이구영) 출연만 했습니다.

정리 안선주/ 중앙대학교 영화과·이영일출판프로젝트 연구원 babtong80@hanmail.net 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