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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2001-02-23

쾌락의 급소 찾기 24탄 - 가장 강력한 여전사는?

이상하게도 여성만화가들의 작품에서 여성주인공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특히나 대작, 그중에서도 판타지적인 경향의 작품쪽으로 가면 그 정도는 더욱 심하다. 어딜 가나 방긋방긋 꽃돌이 미소년들이 범람하고 있다. 그런데 바꾸어 들여다보면, 수많은 남성만화가들이 최강의 여전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밤잠을 설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묘한 역전이다. 여자보다 아름다운 남자들의 세계 반대편에는, 남자 따위는 가소롭다며 단칼에 날려버리는 여전사들이 맹렬한 질주를 거듭하고 있다.

태초에 데즈카 오사무가 ‘소녀들을 위한 만화가 있으라’ 하여, <리본의 기사>(<사파이어 왕자>)가 나타났다. 천사의 실수로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버린 그녀는, 왕자의 행세를 하며 용감하게 칼을 휘둘러 적들을 물리친다. 그러나 천사가 피리를 불면 금세 여성의 섬세한 감수성이 되살아나, 비리비리 힘이 빠져 꽃 속에 파묻혀 버린다. 남자는 칼, 여자는 꽃이라는 고전적인 남녀관에, 그래도 세상을 휘어잡아보려는 여성의 희망이 이 남장 여전사 속에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싸움엔 강하지만 사랑엔 약해?

여성만화가인 이케다 리요코는 프랑스혁명의 격동 속에 오스칼(<베르사유의 장미>)이라는 남장 여전사를 등장시켜 그뒤를 잇게 했다. 용맹함과 검술에서는 남자에게 뒤지지 않지만, 언제나 사랑 때문에 고뇌하고 약해지는…. 본질적으로 로맨스만화인 이 작품에서 아름다워지고 싶고, 남자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여자의 꿈은 세상의 주체로 서고 싶은 전사의 껍질 아래에서 끊임없이 비극의 충동질을 해댄다. 이후 여성만화가들은 점점 여성주인공을 버려나가고, 기껏해야 양성구유의 존재들로 변모시켜 나갔다. 그래도 남장 여전사의 깊은 전통은 남아 있어, 쌍둥이 오빠의 역할을 대신하는 가짜 <바사라>가 긴 칼을 빼들고 사막 위를 내달리고 있다.

싸움엔 강하지만 사랑에는 약한 여전사들은 남성작가들의 작품에서도 쉽게 등장한다. 미래세계의 여전사인 <총몽>의 엔젤은 튼튼한 강철 근육에 화성의 기갑술이라는 고도의 무술을 익히고 있는 최강의 여전사로 등장한다. 그녀는 자기 덩치의 수십배나 되는 살인 로봇들을 가볍게 물리치고, 쟈렘이라는 지배세계에 도전한다. 그러나 항상 그녀는 연애 감정이라는 복병을 만나고, 그것은 마치 손오공의 머리띠처럼 치명적인 급소의 역할을 한다. 물론 <크라잉 프리맨>과 같은 남성전사의 만화에서도 여자와의 로맨스가 비극의 단초를 마련하곤 하지만, 남성만화의 여전사는 너무나 패턴화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워버리기 어렵다.

화려한 필력으로 박진감 넘치게 피와 살을 흩뿌리고 있는 두 만화 <베르세르크>와 <무한의 주인>에서도 남성주의적인 여성관은 잘 드러난다. 이들 작품의 조연급으로 등장하는 여자들은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남자에게 기대고 있으며 남자의 위기를 초래한다.

특히 <베르세르크>의 캐스커는 남자들의 여전사관이 가지고 있는 역겨울 정도로 단순하고 패쇄적인 패턴을 잘 보여준다. 그녀는 그리피스에 의해 목숨을 구하고, 그로 인해 전사로 키워진다. 용맹한 매의 단에서도 그녀를 이길 자는 그리피스밖에 없다. 그러나 가츠에게 불의의 패배를 당한다. 강자만이 여전사를 얻는다? 그녀는 자기를 이긴 두 남자 사이에서 로맨스의 시계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가끔 독자들에게 눈요기를 시켜주고, 처음 드레스를 입고 나와서는 “그러고보면 벌써 몇년이나 스커트를 입은 적이 없어. 근육도 이렇게 불었고…, 역시 이상하지” 하며 가츠 앞에서 한숨을 내쉰다. 겉으로는 강하지만 자기보다 강한 남자에겐 한없이 여성스럽고 나약한, 남자들이 너무나 바라는 기쁨조 여성전사다. 링 위에서 옷 벗길 즐겨하는 여성 프로레슬러와 같다.

그러나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소령에 와서 그 전형성이 조금 변화하기는 한다. 원작만화에서 사이버 레즈비언 섹스를 즐기는 등, 그녀는 어느 정도 남성독자의 눈요기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성격상 남성에 대해 종속적이지는 않다. 쾌활한 성격으로 귀찮은 남자는 한 주먹에 날려버리는 독립적이고 현대적인 성격으로 잘 무장되어 있다. 이러한 독립성은 한 남자에 집착하지 않는 프리섹스형의 여전사들에게 좀더 잘 드러난다. 사실 시로우 마사무네의 <도미니온> <어플리즈드> <공각기동대> 등은 일본 전래의 작품보다는 서구의 SF물과 밀착되어 있는 편인데, 그쪽의 현대적인 팜므 파탈과도 흡사해보인다.

여전사, 자유를 향해 날다

그런 면에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절대 남자에게 종속적이지 않으며 성적인 노리개 역할도 하지 않는 완전한 자유의 여전사 이미지를 가장 잘 드러낸 작품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로맨스나 섹스 코드가 빠져 있다. 나우시카와 페지테의 왕자도 건강한 우정의 단계를 넘어서지 않고, 그래도 로맨스를 찾는다면 황녀 쿠샤나와 부관 쿠로토가 좀더 낌새가 보인다. 그러나 워낙 쿠사냐의 카리스마가 강하고 우월하다. 어쩐지 나우시카는 연애와 결혼의 단계를 뛰어넘어 만인의 어머니가 된 순결한 여신으로도 보인다. 한편으로는 여전사로서 격렬한 전투를 수행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비심으로 모두를 감화시키는…. 그래서 나우시카는 소년들의 이상적인 자아형태인 로봇, 거신병을 자신의 아이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의 파티마들이 모터 헤드를 ‘내 아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최근의 화제작 <최종병기 그녀>에는 지독히 사랑에 약한 여전사가 등장해, 극단의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만화는 <좋은 사람>의 다카하시 신이 그려내는 기이한 로맨스이니까.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자위대의 최종병기로 개조된 소녀. 그러나 그녀는 이제 막 풋사랑에 빠진 여학생. 자신의 성장해가는 몸, 점점 강해지는 힘이 두려워 견딜 수 없고 그것을 남자친구에게 보여주기 싫어 고뇌한다. 강해지기 싫지만, 힘 따위는 필요없지만, 점점 강해져가는 가장 비극적인 여전사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