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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8]

제7장 임권택,정일성,이태원, 행복한 트라이앵글

정일성 촬영감독 인터뷰 2001년 10월18일. 날씨 맑음.

<춘향뎐>에서 소리를 찍으셨고, 이번에는 멈춰 있는 그림을 움직이게 하실 참이십니다. 매번 새로운 작업에 도전하면서도 부담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임 감독님이 이 작품을 제안하셨을 때 가졌던 생각이 있으실 텐데요.

정말 굉장히 부담이 갔어요. 움직이지 않는 그림을 때로 움직여야 하고, 살아 있지는 않지만 그 안에 자연이 살아 있고, 그 안에 살아 숨쉬는 사람의 숨소리를 담아야 했으니까요. 한국화에는 영화적 단점이 있어요. 가로가 너무 길든지, 아니면 반대로 세로가 너무 길어서 필요없는 여백이 너무 많이 생긴다는 거예요. 거기에는 감동이 없어요. <취화선> 때문에 화가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림과 동시에 그 과정을 담으면서 그 색채와 앵글이 나와야 한다는 게 엄청난 압박으로 왔어요. 한 4천자 정도를 필름 테스트했어요. 암울한 색채로 담기 위해 브리치 바이 패스(이 효과는 데이비드 핀처의 <쎄븐>에서 촬영감독 다리우스 콘쥐가 효과적으로 사용한 이후 여러 한국영화에서도 사용되고 있다)로 찍어보려고도 했지만, 우리와는 맞지 않는다는 판단으로 포기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고온현상 대신 여기서는 저온현상을 해볼 생각입니다. 또 하나 우리는 한국화를 모두 빛이 바랜 종이들로 보아왔는데, 사실 처음 그릴 때에는 하얀 화선지였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색 인식 속에서 바랜 색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아마도 담갈색이 주조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이미 <춘향뎐>에서 정일성 촬영감독은 이 판소리의 기분을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란색 필터를 주조로 하여 마치 우리의 옛날 책을 펼쳐 보이는 듯한 화면의 분위기를 만들어냈었다). 한국화를 보면서 여러 가지 영화적인 방식으로 뜯어보고 있는데, 동양 산수화는 단 하나의 화폭에 저 먼 산은 로앵글이고, 눈앞에 있는 것은 아이앵글이고, 아래 물이 흐르는 것은 하이앵글이에요(이걸 동양화에서는 전원이동시점이라고 한다).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고 한 폭의 그림을 찍어서 여백을 보이는 앵글을 찾는 중입니다. 그래서 클로즈업을 통해서도 절묘하게 미세한 디테일을 보여주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전에도 장승업에 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있으십니까.

=그럼요. 내가 김홍도나 김정희의 그림에 대해 갖고 있는 불만은 왜 그림으로만은 안 되고 반드시 그 옆에 화제(畵題)가 옆에 있는지 불만입니다. 그림은 만인에게 평등한 겁니다. 장승업을 통해서 그것을 통쾌하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임권택 감독은 왜 장승업을 선택했을까요.

=원래는 김홍도를 하고 싶어했어요. 이미 십년 전의 일이지요(이건 서로 조금 기억이 다르다. 아마 임권택 감독은 김홍도에 대해서 간헐적으로 계속 관심을 표명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마 그때는 관심은 있지만 자신이 문외한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서편제>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은 거죠. 그 영화를 만들면서 우리는 사실 처음으로 진지하게 판소리를 듣기 시작한 거지요. 한국사람으로서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가 만일 판소리를 잘 알고 있었다면 <서편제>는 대중성이 결여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보는 사람이 아마추어일 때, 오히려 만드는 사람도 아마추어인 영화가 대중적 성공에 도움에 준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림은 모르지만, 장승업의 드라마틱한 삶이 있고, 시대가 있고, 조선조의 몰락한 사회가 있고, 그 안에서 색채를 통한 암울한 느낌이 있고, 그래서 세트까지 암울한 색으로 칠하면서, 그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겁니다. 역사 이야기를 다이렉트하게 하면 재미없는 정치영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김홍도나 김정희보다 더 좋은 그림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가 그렇게 암울하지 않았다면 더 평가받았을 그림의 세계, 철학의 세계, 사람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영상을 통해서 표현한다면 그 자체가 역사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취화선>을 통해서 영화와 한국화의 미학적 고리를 어떻게 잡으려고 합니까.아마도 그 컨셉트는 우리가 헌팅하면서 만난 도예가를 통해서 영감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분 이야기가 옛날에는 도예가가 없었고, 그냥 그런 사람들이 도자기를 구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에게서 예술적인 도자기가 구워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 대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르는 소리 마십시오. 저기 우리 자연을 보십시오. 우리 산천이 척박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저 산의 선, 그 초가의 선, 장독대의 선, 솥뚜껑의 선, 그 전부가 예술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예술 속에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속에 살면 그런 도자기가 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자연이 다 없어지고 나니까, 그래서 지금은 그 선이 갖고 있던 아름다움 대신 서양에서 본 듯한 자기의 아름다움과 우리 자기의 아름다움이 뒤섞인 그런 자기가 구워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장승업이 그리는 화폭의 아름다움이란 바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풍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임 감독과 내가 오래 전부터 우리의 시대를 재현하는 아름다움을 담는 작품을 해왔는데, 그게 사실은 우리 땅이 좋고 아름다웠다는 뜻입니다. 이미 우리의 건축과 기와, 초가의 색채가 그런 것입니다. 만일 내가 완벽할 수 있게 구도나 앵글로 그것을 잡아낼 수 있다면 이미 그게 한국화인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자연이 있는 그대로 찍으면, 그 안에는 이미 우리기 추구하는 색채가 있는 것입니다. 기와 하나, 길 하나, 이것이 한국화구나, 라는 느낌을 찾았습니다. 또 그것이 움직이는 것을 찍으면 강을 그린 한국화가 되는 것입니다. 움직이더라도 하나도 흐트러짐이 없는 앵글이 나와준다면 그 자체로 이동하고 있어도 그 안에 담긴 우리의 자연이 난해한 한국화를 설명해줄 것입니다.시나리오를 읽어보니 드라마를 피하고 에피소드 중심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것도 역시 그러한 미학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까.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거의 영화적인 미학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드라마를 따라가기에 바쁘기 때문입니다. 나는 <취화선>에서 롱숏이나 풀숏을 찍더라도 이번에는 와이드 렌즈를 사용하지 않을 참입니다. 이번에는 최고의 와이드를 35mm 렌즈가 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고, 그 개념 속에서 화면에서 힘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체도 하나의 드라마일 것입니다. 이번에는 주로 35mm, 50mm, 85mm, 그리고 주로 135mm 렌즈를 사용하여 그것으로 승부를 하고 있습니다(내가 현장에 있는 동안 확인한 바로는 25mm와 35mm 렌즈가 주를 이루었다). 그림 그리는 장면을 특별한 렌즈로 찍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승업의 삶을 담담하게 추적하면서 거기서 힘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한국화의 진수는 역시 진경산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승업은 중국 산수화의 방작으로 우리들의 산수를 선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취화선>에서의 풍경은 장승업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까, 아니면 여전히 감독님의 시선으로 보게 될 것입니까.

중국의 풍경을 그렸다 하더라도 장승업의 산수화는 아주 단순합니다. 중국의 산수화는 숨막힐 정도로 복잡합니다. 장승업은 이미 그 시대에 대담하게도 상식을 뛰어넘은 구도를 사용해서 중국화를 모작할 때에도 항상 공간을 비워놓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이미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가능하면 배경을 지우거나 검게 떨어트리는 것은 장승업의 뜻을 담아보려는 것입니다.

임권택 감독은 아마도 정일성 촬영감독을 만나면서 롱테이크 영화를 연출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더이상 롱테이크의 영화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높이서 내려다보면 장승업의 생애가 참으로 단순하다는 걸 보게 됩니다. 기인에 가깝지만 삶 자체는 단순하게 출발했습니다. 거기에 복잡하고 드마마틱한 삶이 얽혀든다면 롱테이크가 어울리겠지만, 단순한 이야기를 단순하게 담으면 그보다 따분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대신 여기서는 숏으로 자르더라도 그 안에 박력과 묘미를 담으면 그 자체가 드라마틱해 질 것입니다.

항상 제게 해주신 이야기 중에 정일성 촬영감독님께서는 당신의 미학이 아름다움 속에서 아픔을 찍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장승업의 아픔은 무엇입니까.

시대입니다. 그러나 장승업은 자기가 불행했다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것에 연연했다면 자살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그림을 통해서 자기가 살아간 시대에서 민초들에게 그들의 이상향을 보여주고자 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루어 가는 불행한 시대의 예술가의 삶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외암 건재고택 촬영장2001년 10월20일 날씨 맑음.

이날은 오랜만에 양수리 오픈 세트장에서 빠져나와 충청북도 온양 근처에 자리잡은 외암(外岩) 건재고택으로 옮겨 장승업의 젊은 시절 이응헌 집에서 보내는 날들을 찍는다. 여기서 장승업은 소운을 만나고 그녀를 평생 마음에 안고 살아간다. 이 건재고택은 조선 명종 시절 장사랑을 지낸 이연 일가의 낙향으로 이주한 이후 예안 이씨 일가가 살기 사작하여 시작된 집안 내력을 지니고 있었다. 국가지정 문화재 중요민속자료 236호로 그 이름에 맞게 (주병도 미술감독의 말을 빌리면) “제대로 지은 집인데다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다만 집안 마당의 정원이 일본식 분재나무들로 차 있어서 여전히 여기에도 일제 식민지 강점하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도착하는 날은 간단하게 몸을 푸는 정도의 장면을 찍었다.

영화는 자기 시대의 매너를 존중해야 한다 2001년 10월21일에서 이틀 동안 날씨 맑음. 이 촬영은 모두 거지였던 장승업을 거두어주었던 이응헌의 집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스무살의 장승업은 소녀 소운을 보고 언감생심 연심을 품어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녀는 다른 양반집 자제에게 시집을 간다. 그걸 장승업은 안타깝지만 그냥 멀리서 지켜보아야만 한다. 이 공간은 세트장이 아니라서 공간적인 제약이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도 이미 지어진 건축 구조물에 맞추어서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신기한 장점들이 눈에 보인다. 방문을 열면 다시 방문이 이어지고, 그 뒤에 마루가 있고, 다시 방문을 열면 방이 나온다. 첩첩이 방이 이어지는 그 공간의 깊이는 다름 아닌 이 영화의 프레임의 미학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반대로 대문을 등 뒤로 하고 보면 마루를 정면으로 그 뒤로 다시 안채가 보인다. 그러니까 마루의 프레임을 걸고 그 뒤로 마당이 있고, 다시 안채가 펼쳐진다. 이런 경우 가장 바빠지는 사람은 조명기사이다. “정일성 촬영감독과는 세 번째지요. 그 전에 배창호 감독의 <황진이>, 그리고 박철수 감독의 <안개기둥>, 그리고 이번에 만났습니다. 그 전에는 주로 유영길 촬영감독과 한 30편 정도 했지요. 이번 작품의 기본 톤은 어둡게 가는 것입니다. 다만 장승업이 기생 매향과 진홍을 만나는 장면은 아름답게 가자는 것입니다. 임권택 감독과 처음 만난 건 1961년 감독님 데뷔작에서 내가 엑스트라로 출연하면서 만났습니다. (웃음) 무엇보다도 원칙은 조명이 촬영에 묻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빛이 보이면 그 영화는 이상하게 되는 거죠. 빛이 보이면 드라마를 방해하니까요. 그 공간에 들어와서 어디에 인물이 서 있을 것인가가 결정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감독님이 여기서 무엇을 찍고 싶어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배우가 예쁘게 보이는 건 소용없는 일입니다. 영화는 한 장면으로 찍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배우가 안 보일 수도 있죠. 그 대신 감독님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의 감을 살려내는 것이 조명의 위치인 거죠. 빛은 연출을 따라가는 것입니다.”(김동호 조명기사와의 인터뷰)

임권택 감독은 여간한 경우가 아니면 조명에 대해서는 일체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맡겼다. 그 대신 다른 방식으로 물었다. “거기서는 그 책상을 찍어야 하는데.” 그 말은 구도가 아니라 그 책상에 조명의 조도를 맞추고 나머지는 지워버리거나 무시해도 괜찮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종종 현장에서 임권택 감독은 공간에서 빛의 차이를 이루는 경계의 중심을 어디에 맞추면 나머지는 안 보이거나, 지워지거나, 종종 어디에 그림자가 떨어지는지를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권택 감독 영화의 빛은 대부분 고전주의 조명과 바로크 조명 중간에 걸쳐 서 있었다(그러나 이것이 정일성 촬영감독의 취향인지, 아니면 감독님의 경향인지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자리에 있지 않다). 아마 절대로라고 할만큼 북극성 조명은 사용하지 않는데, 그것은 이 빛이 우리의 전통에 없는 빛이기 때문인 것 같다. 주로 중심을 놓고 거기서 퍼져나가는 일종의 촛불과도 같은 효과의 빛을 쓰는데, 물론 그 자리에 주인공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임권택 감독 영화에서 우리가 주인공을 화면에서 놓치는 경우란 거의 없다(정반대로 안토니오니의 영화에서는 자꾸만 화면을 두리번거리면서 주인공을 찾게 된다). 전통가옥구조에 들어왔을 때 우선 내부에 기본 조명을 놓고, 그 다음에는 창문을 더 밝게 만들고 인물을 앉혀본다.

물론 장면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날의 촬영은 여러 개의 방을 겹치면서 중간을 어둡게 놓고 뒤를 밝게 만들었다. 아마도 이것은 깊이의 문제인 것 같다. (그렉 톨랜드의 말 “공간이 떨어져 보이면 영화의 그림자는 깊이를 만든다”) 집사가 이응헌을 찾아와 인사를 드리는 대목에서는 한 화면에 다섯개의 프레임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 집사는 와서 인사하는 대신 기침으로 노크를 대신한다. 그건 요즘 하지 않는 방식이지만, 그 당시의 매너를 끌어들이는 것이 임권택 영화의 중요한 장치이다. 그래서 종종 우리들이 생각하지 않은 이러한 기침이 때로는 숏의 동선을 시작하는 포인트가 되거나, 때로는 컷 포인트가 된다. 이 안에서 비로소 영화가 시대의 공기를 담아내기 시작한다. 영화는 자기가 만들어지는 시대의 매너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장면 # 31 이응헌의 집(승업의 방)

(벌컥 열리는 승업의 방문. 이응헌이다. 쪼그려 자고 있는 승업을 조용히 바라보던 이응헌, 밤새 승업이 그림 그림을 발견하고 놀란다. 이응헌의 서슬에 잠을 깬 승업. 급히 일어나 무릎을 꿇고 조아린다)

이응헌 “아직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그림을 어떻게 네 놈이 그렷단 말이냐?”

승업 “몰래 훔쳐본 일이 있습니다.”

이응헌 “집안에 도둑놈을 끼고 살았구만.”

이 장면은 이응헌이 소장하고 있던 중국 화가 진가언의 <수선매작도>를 한번 훔쳐보고 밤새 모작을 그리던 장승업의 그림을 아침에 이응헌이 우연히 발견하는 대목이다. 이 장면은 모두 네 숏으로 나누었다. 나누는 방법은 간단하게 시선을 따라 나누었다. “원칙이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지요. 먼저 장면이 나와야 합니다. 이런 경우 먼저 정해야 할 것은 이 장면이 책임을 추궁하는 장면이지요? 그걸 추궁하는 쪽에서 찍을지, 아니면 추궁을 당하는 쪽에서 찍을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걸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지는 거요. 단순히 반대가 되는 것이 아니오. 그래서 신이 나오면 이미 컷은 나뉜 거지요. 현장에 와서 숏의 구도가 바뀔 수는 있어도 여간해서 컷이 바뀌지는 않는거요. 만일 컷이 바뀌면 그건 그 신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경우지요.” (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 이 말은 숏과 신의 관계에 대해서 매우 의미있게 받아들여졌다. 쿨레쇼프의 그 유명한 명제, 몽타주는 대답하고, 미장-센은 질문한다. 고다르의 대답. 그래서 몽타주와 미장-센은 집합의 관계이다. 들뢰즈의 해석. 그 관계는 운동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의식이다. 문제는 결국 신에서 첫 숏이 중요하다. 그것이 틀리면 신 전체의 의미가 질문으로만 가득 차고 대답은 없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렇다. 특히 데뷔작들. 그래서 무언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대가들의 신이 단순하게 보이는 것은 그것이 자아-의식을 내포한 대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권택 인터뷰3

다행히도 그날 오전은 한가하게 진행되었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 감독님 곁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물어볼 수 있었다. 이 이야기의 일부는 오즈와 미조구치에 대한 감독님의 견해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지금 함께 영화를 만들고 있는 중국영화들에 대한 생각도 들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감독들과 할 때가 제일 재미있다. 그러나 이 자리는 그런 이야기를 전하는 지면이 아니다. 더 궁금한 것은 감독님이 공간과 만나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서였다.

“어떤 건물이든지 처음 만나면 커보이지요. 그게 내 안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춘향뎐>을 찍을 때에도 광한루에 갔는데 이게 너무 커보인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냥 계속 주변만 찍었어요. 밀착해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거요. 처음 만났을 때 그걸 찍으면 의미가 없는 거지요. 그걸 어디서 찍어야 할지를 모르니까. 아마 내가 줄기차게 한옥을 찍는 것도 그게 그만큼 친숙하다는 의미일 게요. 나는 현대건물에 대해서는 정이 안 붙어요.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지만, 거기에는 나의 친숙성이 없어요.”

그러면 그런 공간에서 감독님에게 가장 친숙한 카메라 거리는 무언가요.

“나에게는 35mm가 가장 편해요. 50mm는 육안에서 더 당겨들이니까 부담스럽고. 그걸 기준으로 놓고 뒷배경을 당기거나 훌쩍 뒤로 밀어내면서 왜 당겨야 하는지, 아니면 왜 밀어내야 하는지를 찾는 거, 그것이 영화의 의미이지요. 사실 한옥은 사각형이어서 단조롭기 짝이 없는 건물이지요. 단조로움이 필요할 때는 다행이지만, 그게 필요없을 때에는 원수덩어리인 거요.”

그렇다면 지금 데뷔작을 만드는 감독들에게 해주고 싶은 충고가 있으신가요.

“모두들 잘 만들고 있으니까. (웃음) 단지 등장인물의 심리적 흐름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 흐름만을 좇아가라는 겁니다. 다른 주변 돌아보지 말고. 영화는 보는 사람을 편하게 해줘야 해요. 아마도 자꾸만 그 등장인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서 내리누르거나, 아니면 올려다보는 걸 찍을 수도 있지만 그건 특별한 거예요. 항상 평소의 각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늘 일상에서 보는 시선이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연출자와 촬영은 계속 이야기를 해서 이야기의 운용해나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구도가 나오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그냥 좋은 구도는 의미가 없어요. 최선의 원칙은 항상 이야기에서 나온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자꾸만 이상한 데서 영화를 찍는 건 지금 자기가 찍고 있는 이야기가 무언지를 모르는 데서 나오는 구도지요.”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 인터뷰 2001년 10월21일 날씨 맑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남에게 귀에 즐거운 말을 잘못한다. 더구나 그게 영화일 때에는 더더구나 그렇다. 나는 영화평을 쓰면서 무수하게 원수를 만들었다. 심지어 싸이더스의 차승재 사장은 나보고 영화감독을 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누가 돈을 내겠어요, 라고 반문하자 예의 호탕한 웃음을 웃고 난 다음 “걱정 말아요. 아마 감독들이 나서서 성금을 걷을 겁니다. 그래서 총살대로 올려보낼 겁니다”라며 크게 웃었다.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에게 영화는 진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길게 늘어놓고 시작하는 이유는 이 영화를 제작하는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소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다. 분명한 것은 내가 만난 이태원 사장은 멋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진짜로 영화 하는 게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거의 매일 현장에 와서 영화 촬영을 구경하면서(세상에서 제일 지루한게 영화 현장 구경이다. 단 일분을 찍으려고 한나절을 보내기도 한다), 추운 날씨에도 벌벌 떨면서도 그걸 즐길 줄 안다. 가끔 스탭들과 큰소리로 농담하다가 동시녹음중에 엔지를 내서 감독님에게 야단을 맞아가면서도 즐겁게 생각한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질문 드리겠습니다. 제작비는 얼마인가요.

=한 60억원 정도입니다. 마케팅비 포함이지요. 아마 순수제작비는 50억원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임권택 감독과 벌써 15년째 인연입니다. 아마도 여기에는 인간적인 정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기는 그렇죠, 아마 84년인가, 그때 <비구니> 할 때였죠. 서로 처음 만난 게. 영화 만든다는 게 뭡니까? 영화감독이랑 제작자랑 서로 적당히 심술부려가면서 다투면서 돈 뺏어가면서 찍는 겁니다. 그런데 그 돈을 그림에 담는 게 중요합니다. 영화감독이란 예술을 하는 사람이지만, 다른 예술가와 다른 게 경제인이자 경영인인 겁니다. 감독이란 욕심이 많은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매번 판단을 해주어야 합니다. 욕심부리면 한이 없죠, 그러니까 중요한 건 마인드입니다. 그래야 이쪽도 동의하는 겁니다. 임권택이랑 왜 이렇게 하느냐? 서로 말이 필요없어요. 나는 아직 이런 사람 못 봤습니다.

-(실제로 나는 <취화선> 촬영현장에서 장승업이 피리 부는 장면을 찍는 대목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 장면은 일분 동안 찍는다고 스크립터에게 이르고 슛을 불렀다. 그런데 그만 그 장면에서 시간을 놓쳐 30초를 더 찍었다. 그러자 임권택 감독은 불같이 화를 내셨다. 수없이 엔지를 부르면서 필름을 아끼지 않는 대신 불필요하게 필름이 낭비되는 것을 못 참아하신다. 최근의 한국영화의 젊은 감독들이 필름량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자랑처럼 생각하는 풍토는 정말 개선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서 임 감독은 나를 끌고 다니는 힘을 거기서 나오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물려 들어가는거죠. (웃음) 좋은 제작자는 감독이 만드는 겁니다.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 있어야 이 일도 하고 싶은 겁니다. 내가 그거 없으면 뭐 답답해서 이 동네에서 놀겠어요? (웃음) 학생들이 찾아와서 어떤 감독이 되어야 하느냐고 물었어요. 제작자를 끌고 다니는 감독이 되어라, 내가 그렇게 말해줬어요. 그건 말로 끌고 다니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끌고 다니는 거예요. 미안하지만 나 좀 건방지게 말하겠어요. 나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나 영화계 꽤 위하는 사람이에요. 좋은 한국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나 이 사람 하나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다음 세대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툭툭 건드려봤어요. 그러나 내 생각엔 이건 아닌 거야. 이런 이야기 처음 하는데, 그래서 포기했어요. 나는 예나 지금이나 최고 영화는 작품성도 있고, 흥행성도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런 영화는 전세계적으로 <대부> 정도가 나와야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건 한 세기 통틀어서 몇 안 나오는 영화예요. 하지만 그건 우리가 추구하는 꿈이죠. 그런 영화를 만들면 요새처럼 흥행이 되느냐 마느냐, 흥행은 되는데 영향을 끼치냐 마냐, 이런 걱정하지 않고 여러 사람이 공감하는 영화 만들면 얼마나 좋겠어요? 도대체 칸이 뭐냐? 돈돈돈 하다가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영화란 인정받는 거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어디서 인정을 받아야 하느냐, 그러면 국제적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는 거예요. 그게 모냐? 칸에서 그랑프리 받는 거란 말이지. 내가 이 바닥에서 아직도 남아서 20년 동안 이거 하는 건 진짜 한번 영화 해보자는 거예요.

-임권택 감독님이 화가 장승업에 관한 영화를 하자고 하셨을 때 첫 번째 든 느낌은 어떠셨습니까.

=괜찮았어요. 왜냐? 여자가 있고, 술이 있고, 그리고 거지 출신이니까. 바닥에서 뜬 놈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장렬하게 가는 부분이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무언가 넘어서고자 하는, 그것도 평생을! 그건 누구나 하고 싶어하는 거지. 그런 의욕과 패기가 없는 사회는 얼마나 시시해? 그러나 그게 안 되는 거야. 그러면서도 죽을 때까지 속고 사는 게 세상인 거예요. 이야기 딱 들으니까 마음에 드는 거야. 이건 임권택이다, 이런 생각이 든 거야. 그런데 장승업으로 최민식을 캐스팅했는데 가만 보니까 이건 최민식인 거야. 그리고 정일성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건 괜찮은 거야. 거기 인간이 있으니까. 이건 <서편제>나 <춘향뎐>보다도 더 왔어요. 그리고 보다보니까 이건 내 이야기이기도 한 거야. (웃음)

-임권택 감독님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하시는 작품은 무엇입니까.

=<만다라>. 그 사람은 그게 최고야. 그거 보고 이 사람하고 일해야겠다, 결심했어요.

-그러면 제작하신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요.

=<장군의 아들>. 시원하고, 남자답고, 손님 많이 들고, 그런데 내가 잘못한 게 있어요. 이걸 1편만 했어야 하는데 3편까지 만들면서 이 사람을 4년8개월 동안 붙잡아놓았으니. 하마터면 이 사람을 국제적으로 영화인들이 잊을 뻔했어요.

-사실 칸영화제는 감독을 위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칸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명예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 안에 내가 들어 있잖아. 그러면 된 거야. 우리 회사 태흥 이름으로 상 받는 거잖아. 그거면 된 거야. 내가 장승업은 아니지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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