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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못난 마음들 같으니라고
윤성호(영화감독) 2010-04-30

다큐멘터리 <경계도시2>에서 말하는 이들의 숨은 욕망을 보고야 말다

요새 들어 자꾸 단어를 잘못 접수한다. 가령, ‘세방 현상소의 이은송 기사님’이라는 말을 ‘셋방 사는 이은송 기사’로 잘못 듣는다든지(기사님, 멋대로 호명해서 죄송합니다) 하는 식으로, 주변의 메모, 지하철 벽의 글귀며 가판대의 헤드라인 등등을 흘낏 보고 ‘엥, 이게 뭔 소린가’ 흠칫한 뒤, 다시 보면 그 말이 그 말이 아니다. 몇 가지 사례. ‘성적 소수자’ - ‘성적 우수자’ ‘몽골 문화촌’ - ‘몽골 문희준’ ‘부드러운 내러티브’ - ‘더러운 내러티브’ ‘가도 가도 끝없는 삼만리’ - ‘가도 가도 끝없는 밥 말리’ ‘박근혜와 친박연대’ - ‘박신혜와 친박연대’ ‘그녀가 뉴비틀을 갖는 방법’ - ‘그녀가 뉴비듬을 갖는 방법’ 등등등.

안경 도수야 갱신하며 살고 있으니 시력 탓은 아닌 듯하고, 어쩌면 인지적인 장난을 나도 몰래 거는 것도 같다. 아침을 거르고 점심때도 놓치며- 무슨 대단한 영화를 보겠다고- 모 원고를 마감하던 날, 백반집 창문에 써 있는 ‘제육볶음’이 ‘제육복음’으로 보였고, 근심스러운 일들이 나라 안에서 연일 터지는 요즘 ‘사골국수’라는 메뉴가 ‘시국빙수’로 읽혔다. 충격적인 범죄 뉴스에 어느새 익숙해졌는지 ‘경기 연쇄살인’을 ‘정기 연쇄살인’으로 오인했고, 이사를 앞두고 전에 살던 방의 보증금 빼주는 타이밍을 걱정하던 찰나 누군가에게 받은 문자 ‘감독님 이사가세요?’ 를 ‘감독님이 사가세요’ 라는 실없는 충고로 접수. 이렇게 착각한 문구들이 종종 어떤 속마음을 드러낸다고 할까. 비약하자면, 학자들 말마따나 ‘욕망은 간접적으로 적나라하다’. 보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본다. 말해진 것을 듣는 게 아니라 듣고 싶은 만큼 듣는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창세기 37장 5절

즉, 우리의 착시나 잘못 내뱉어진 발화들은 종종 단순한 실수가 아닌, 오히려 제 속에 저도 모르게 쟁여놓은 판단들을 흘리는 의도적인 밸브 역할을 하는 셈. 지난달에 본 영화, 며칠 전에 왈가왈부했던 인터넷 게시물, 어제 만난 그이에 관한 기억, 그 모두에 관한 확신할 수 없는 뒷담화들. 다만 확실한 건 그걸 복기하는 말과 글과 제스처를 통해 도마에 올려진 대상보다는 오히려 말하는 이의 속셈과 지향, 꿈과 집착이 드러난다는 것.

영화 속에서 나온 ‘우리 송두율’이란 대사

화제의 다큐멘터리 <경계도시2>에는 그렇게 ‘서로의 속내를 들키는’ 발화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영화 후반, 숙소에서 밤새 대책회의를 하는 송두율 귀국추진위원회를 고정된 숏으로 지켜보는 롱테이크. 말 그대로 난상토론을 긴한 점프컷으로 구성한 장면을 보며 새삼 ‘아하, 영상과 문학의 차이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내가 좀 입문자스럽다). 요란한 시각효과를 구경하는 게 영화의 미덕이 아니라, 화면 속에서 나를 닮고 너를 닮은 사람들을 대면하는 가치. 제 훈수 둘 순서를 기다리는 표정과 육성을 보며 쑥스러운 공명을 할 때의 찌르르함. 또 한 장면, 어쩌면 더 묘한 순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송두율 교수를 기다리는 법정의 바깥에서 진보계열 시민단체와 수구성향 우익단체가 공히 집회를 하느라 분주한데, 이때 우익쪽의 장년 MC가 무리를 리드하며 뱉는 발화가 재밌다. “자, 자, 여기 지금 우리 송두율, 우리 간첩이 말이죠.” 리슨 앤드 리피트. 우리 송두율, 우리 간첩(이렇게 두번 말하는 걸 운동이라고 한다). 옳지, 사람은 누군가 근접거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라는 수식을 쓰진 않는다. 당연한 내 편으로 여기거나, 적어도 제 편한 언덕으로 여길 때 무심코 쓰는 ‘우리’ 엄니, ‘우리’ 동네, ‘우리’ 호구.

여기서 뒷북으로 영화 소개. 2003년, 대통령도 두번 연속 내키는 사람으로 이어간 차제에, 이른바 진보 내지 민주화 진영은, 이 땅의 레드 콤플렉스를 청산할 호기를 맞았다는 자신감에 부풀어, 베를린의 ‘경계인’ 송두율의 귀국을 돕는다. 아마도 일종의 시금석 또는 촉매 역할을 기대했으리라. 홍형숙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표생물. 그러나 그 터를 닦는 운동이 예상보다 가파르게 여론전에 밀리면서 터를 잡긴커녕 구명운동에 올인해야 할 상황에 처하는데, 그런 송 교수의 발목을 잡는 족쇄 중 하나는 그의 독일 국적이다. (헤아려 생각하자면) 남과 북을 오가는 경계인이 되기 위해 유지해온 시민권이 오히려 이 땅의 일반 대중에게 뜨악한 잉여로 여겨진 때문. 진보운동가로서의 이력보다 독일 시민이라는 신분이 ‘적’(?)에게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부여한 것. 따라서 이후 그가 겪는 고난은 지난 시절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던 인물들이 겪는 일반적인 그것과는 또 다르다. 어쩌면 2PM의 재범이 겪은 마타도어에 가깝지 싶다. 예전 날적이로 인한 때늦은 구설수 때문에 인기의 정점에서 돌연 시애틀로 돌아가야 했던 재범처럼 레드 콤플렉스 청산의 지표로 귀국했다가 오히려 우리가 가진 그 이상의 콤플렉스를 확인시켜주는 촉매가 되어버린, 그리하여 민주화 진영이 아닌 오히려 보수(?) 우익세력의 게임볼이 되어버린 송두율. 그 존재로 인한 파장을 기꺼워한 수구 집회 인도자 입에서 저도 모르게 나온 조어가 바로 ‘우리 송두율’.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창세기 37장 18~20절

그렇다면 문득 궁금해진다. 천안함 침몰 사건을 둘러싼 수많은 발화들은 과연 세월이 지나 어떻게 복기될까, 재연될까, 드러날까. 누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보다 더 궁금한 건 누가 누구를 어떤 마음으로 애도하는가의 문제. 攻은 누구였으며 守는 누구였을까. 우리는 누구이고 그들은 누가 될까. 인명구조 또는 상황파악, 그 밖의 해명과 사후를 맡은 이들의 바뀌는 말들, 어긋난 진술들, 문득 내뱉어지는 실언들을 통해 들키는 못난 마음들. 경계도시 한국? 아니 경계가- 사실과 본의가 무엇인지 숙고할 영역으로서의 ‘그린존’이- 사라진 우리나라. 인용한 창세기 에피소드 속 가련한 요셉은 어쨌든 살아남아 모두를 건사한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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