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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영화의 사회학을 위해 <두사부일체>와 <화산고>
2001-12-19

우리들의 일그러진 거울

● 최근 극장가에 나란히 내걸린 <두사부일체>(감독 윤제균)와 <화산고>(감독 김태균)는 학교라는 공통된 배경, 흥행에서 기선을 잡으려는 배급팀의 샅바싸움 같은 요소 이외에 장르의 관습과 차별화라는 관점에서도 함께 묶어 논의할 만한 대상이 된다. 그런데 두편에 대한 개별 리뷰나 비교에 앞서서 먼저 시도되어야 할 것이 이른바 ‘조폭영화’ 자체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조폭을 정면에 내건 <두사부일체>는 말할 것도 없지만 <화산고> 역시 ‘학원 무협 블록버스터’라는 신종 개념에도 불구하고 상당부분 조폭영화의 특징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 수준 높은 예술영화가 시장에서 고전하는 것을 근심하느라 ‘저속한’ 조폭영화들에 별 한두개씩 덜렁 던져놓고 째려보는 동안, 수백만 관객은 제작자와 감독들을 끌고 밀며 조폭영화의 생명력을 늘려나가는 중이다. 덕분에 우리는 지금 하나의 하위장르(sub-genre)가 탄생하고 진화하는 전형적인 과정을 목도하고 있다.

조폭영화, 새로운 하위장르의 탄생

장르를 불문하고 오늘날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상업영화를 보면 확연하게 변한 관객 구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과거에 영화산업을 지탱시키던 가족시장이 텔레비전 몫으로 돌아가고 영화는 20∼25살 정도의 젊은이를 주력대상으로 하는 틈새시장(nitche-market)으로 분화되었다. 영화 속에서 어린이와 중년층이 사라지고, 대신 결혼 상대 찾기를 주제로 하는 멜로드라마나 가정 바깥의 횡적인 연대를 강조하는 집단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조폭영화는 후자의 범주 가운데서도 특히 가정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젊은 남성들 사이의 유사 혈연 공동체 의식(pseudo-family-bond)을 겨냥한 내러티브가 특징적이다.

또한 테크놀로지와 관객의 상호작용도 조폭 장르가 형성되는 저변을 이룬다. <화산고>의 진정한 주역 가운데 하나는 컴퓨터그래픽을 중심으로 한 현란한 테크놀로지인데, 컴퓨터 테크놀로지는 이 영화의 비주얼을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그와 같은 종류의 컴퓨터 게임을 즐기며 성장한 관객 자체를 창조해둔 바 있다. 그러므로 조폭영화가 플롯이나 주제의식의 진정성 대신, 자못 장대한 액션이나 유려한 카메라 움직임 등 시각적 불꽃놀이에 치중한다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게임이나 만화 등 이들 관객과 친근한 주변 매체들 역시 영화의 비주얼과 연기 양식, 캐릭터, 나아가 플롯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화산고>의 제작진이 내보낸 보도자료 첫머리에서 “영화읽기가 아니라 영화보기를 하라”고 이례적인 권고를 하면서 스토리의 짜임새, 캐릭터의 입체감, 드라마적 감동보다는 귀를 찢는 음악, 현란한 볼거리, 감각적인 편집 아이디어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고 자못 당당하게 밝히는 배짱도 바로 이런 맥락에 놓여 있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나타나는 멜로드라마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장르는 우연처럼 보이는 특정 작품의 흥행 성공으로부터 시작되어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세련화되고 걸작을 몇편 산출한 뒤 패러디와 쇠퇴를 거쳐 묘비명이 되는 작품을 끝으로 사라지는 생장사멸의 순환을 관찰할 수 있다. 이같은 관점에서 조폭영화의 기원을 1990년대 초·중반에 나온 <게임의 법칙> <깡패수업> <본투킬> 같은 영화들로 소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유행하는 조폭 장르의 직접적인 출발점은 <주유소 습격사건>(감독 김상진, 1999)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영화의 경우 주인공이 조직폭력배는 아니지만, 몇 가지 점에서 조폭영화의 원형적인 특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나온 <친구>가 본격적인 흐름을 열었다면, <킬러들의 수다> <조폭 마누라> <달마야 놀자> <두사부일체>는 다양한 방향으로 변주되는 조폭 장르의 진화단계를 보여준다. <화산고>는 그 변주의 정도가 좀더 두드러진다.

남성 속에 숨은 신화를 확대재생산

조폭영화가 드러내는 장르적 특질에 대해서는 앞으로 이 계열의 영화들이 생산되어 나오는 것과 발맞추어 본격적인 논의가 뒷받침되어야 하겠으나, 일차적인 관찰만으로도 몇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조폭영화의 주인공은 도시 노동자 계층 남성들의 뒤틀린 자화상으로 보인다. 그들은 대부분 집안환경 등 경제적인 이유로(경제적인 문제는 때로 지역적인 문제로 치환되는데 조폭들이 쓰는 사투리가 이 문제를 예민하게 반영한다) 고등학교 교육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다. <두사부일체>는 조폭들이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서 이를 코믹 코드로 활용하는 예다.

사회생활의 경쟁에서 정상적으로 승리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허락된 하나의 탈출구가 바로 폭력에 기초해서 지역 상권을 장악하는 길이다. 이렇게 되면 가끔씩 야구 방망이나 식칼을 들고 집단 패싸움을 해야 한다는 사실만 빼고는 외견상으로 부르주아적 삶과 구별되지 않는 폼나는 인생이 된다. 제도화된 소외와 계급 차별이 존재하는 도시 환경 속에서 합법적으로 권력과 성공에 접근하는 것이 봉쇄되고 그래서 부를 강탈하기 위해 비인간적인 도구와 기술을 사용한다는 갱스터영화의 도식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이 조직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관습적인 도상(iconography)은 세련된 양복이나 가죽재킷을 빼입고 룸살롱에서 고급 양주를 마시는 것이다. <두사부일체>는 이런 요소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며, <화산고>에서도 청부 폭력배의 이미지를 지니는 화산5인방이 입은 가죽의상은 물론이고 여주인공의 교복 역시 가죽코트의 느낌을 변형한 디자인이다.

이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조폭 집단 내부의 연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조폭사회의 절대 윤리가 ‘의리’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일반사회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의리를 최고의 윤리적 덕목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는데, 전통적인 가족관계를 묶어주는 효도 등의 윤리가 쇠퇴한 대신 유사가족의 도덕률로 의리가 대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폭 내부로 들어가면 의리는 다시 상하관계에 대한 절대복종이라는 봉건적인 수직윤리와 결합한다. 예컨대 룸살롱에서 하급자가 상급자로부터 최대한 겸손한 자세로 술잔을 받아 마시는 것은 상당히 강력한 도상이다. 의리와 절대복종이라는 집단윤리는 <두사부일체>나 <화산고> 모두 마찬가지다.

조폭영화는 또한 대도시의 사회조직이 사실상 범죄자 집단과 구별되지 않거나 조폭보다 더 사악한 조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도시에는 공적 질서가 부재하고, 공적 질서의 대표 기구인 국가 공권력이나 교육 기관이 오히려 부패와 결탁되어 있거나 부패 그 자체라는 생각은 <두사부일체>와 <화산고>가 가장 강력하게 문제삼고 있는 부분이다. 타깃 대상을 청소년층으로 두고 있는 조폭영화가 온갖 교육문제들로 들끓고 있는 학교로 찾아들어가 한바탕 뒤집어놓고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는 전략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올 조폭영화는 어쩌면 여의도를 습격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조직폭력배, 특히 두목급 조폭은 사회와 근본적으로 불화하는 낭만적 영웅으로 그려진다. 주인공의 과거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가 세상과 불화할 뿐만 아니라 법체계와 노골적으로 대립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별’이 몇개 달린 전과자이거나 퇴학을 몇번씩 당한 사실(<화산고>)만으로도 간단하게 설명된다. 공적 질서를 신뢰하거나 의지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공백은 조폭집단이 대신 메우게 되고 이때부터 선한 조폭과 악한 조폭이 나뉘어 대립한다. 이를테면 <두사부일체>에서 학교 당국자가 악한 깡패라면, 졸업장 따러 들어갔다가 얼떨결에 싸워야만 하는 주인공은 선한 깡패가 된다. <화산고>에서도 억압적인 학교 질서를 유지하려는 교감과 화산5인방, 그리고 이에 맞서는 학생집단의 구도는 기본적으로 이와 일치한다.

외부 세계와의 경쟁에서 늘 단호한 폭력으로 승리해왔던 조폭집단 내부에 선악에 대한 분별이 싹트고 낭만적인 휴머니즘에 지배되는 순간 조폭 두목은 영웅적인 패배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애써 그 길을 외면하던 조폭 두목이 급기야 싸움에 참여하기를 선언하는 것은 사랑하는 여성이 위기에 처하는 순간이 되고, 이 과정을 영웅화하는 집단 패싸움과 남성간의 감상적인 동료애가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반드시 포함된다. 이것은 <두사부일체>와 <화산고>가 공유하는 플롯이다.

요컨대 조폭영화는 가진 것 없지만 자존심과 지배욕이 강한 타입의 남성성을 허세 가득한 도상과 미장센으로 그려내는 남성들의 판타지이자 신화다. <조폭 마누라>는 남성 주인공들이 과시했던 모든 자질들을 다 갖추고 있는 여성 조폭을 내세우면서, 성에 대한 순진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여성 관객에게는 섹스 코미디로, 조폭영화의 관습에 익숙한 남성 관객에게는 여성성과 모성성이 초래하는 근본적인 부조화를 선보이는 장르 변주를 통해 호소력을 획득한 경우다.

<친구> 이후의 변주

그런데 <친구> 이후에 나오는 조폭영화는 또 하나의 강력한 흥행코드인 코미디와 결합하면서 주인공들의 운명을 약간씩 다른 방향으로 변주해낸다. <두사부일체>나 <화산고>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내러티브 라인이 위와 같은 도식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이 때문인 것 같다. 특히 <화산고>는 무협과 조폭영화의 유사성을 간파하고 그 기원을 잘 찾아들어갔다. 무림의 세계든 조폭의 세계든 현실세계와 일정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둘 다 현실세계를 양식화한 공간이라는 점, 예술적인 경지로까지 승화된 무술 혹은 폭력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야쿠자영화가 사무라이영화의 장르적 변형이라는 점을 기억하면 더욱더 무릎을 치게 된다.

조폭 장르에 대한 관객의 호응은 현대 한국사회의 속성이 근본에서 조폭과 마찬가지이며 특히 신뢰할 만한 정치적 지도력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심리적 공명(共鳴)인 것으로 보인다. 이 장르가 표현하는 과장된 절망의 제스처는 동시에 그 무엇인가에 대한 강력한 소망의 제스처로 읽힌다. 현대인을 사로잡고 있는 소외의 굴레들을 양식화된 방식으로 그려보이는 조폭영화는 그 해결책으로 남성적인 힘의 지배를 소망한다. 그러나 그같은 시도는 늘 좌절하거나 어려움에 부닥친다. 권위있는 남성권력을 열망하면서도 그것의 성취불가능성을 아울러 토로하는 조폭영화는 황량한 한국인들의 내면적 혼란과 모순, 실존적인 방향상실을 지시하는 하나의 의미있는 징후가 아니겠는지.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