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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O.S.T
2001-12-27

로큰롤의 가면 벗기

핀란드의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만든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는 마술적인 코미디다. 슬랩스틱의 정반대, 썰렁하고 창백하고 무표정하며 몸을 거의 쓰지 않는 툰드라식 슬랩스틱. 이 영화는 실존하는 밴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를 중심 캐릭터로 삼아 그들이 매니저와 함께 황량한 얼음땅에서 미국으로, 다시 멕시코로 떠나는 여정을 그린 로드무비이다. 핀란드의 80년대 ‘누벨바그’에서 핵심인물인 그가 대중적으로도 성공시킨 이 작품은 1989년에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 소개된 건 1996년의 일이다. 그리고 그 사운드트랙 앨범이 뒤늦게나마 발매되었다.

이 영화를 보고, 또 사운드트랙을 듣고 새삼 되묻게 되는 건 지금 세계인의 음악적 정체성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가령 우리의 음악적 정체성은 순수한 ‘국악’과 일대일로 대응될 수 없다. 국악을 하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 꼭 이중언어 사용자 같다. 무대에 올라 <춘향가> 한 대목을 멋들어지게 뽑지만 휴대폰 사서함에는 그루브 넘치는 힙합이 녹음되어 있는 식이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북유럽의 두 박자 춤곡 스타일을 기본으로 미국의 로커빌리, 하드록, 심지어 칠리 냄새 나는 멕시코 음악까지 두루 섭렵한다. 물론 그들의 음악적 편력은 다양한 전통의 음악들을 진지하게 내면화하려는 노력보다는 그 스타일들을 차용하고자 하는 시도의 결과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는 현상이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가 보여주는 코믹한 합성 음악과 우리의 크라잉 너트가 들려주는 펑크적 감수성의 슬랩스틱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이런 ‘음악적 혼종현상’의 근저에는 무엇이 있나. 물론 거기에는 세계 음악의 슈퍼 에고, 로큰롤이 존재한다. 이 영화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라는 지구 변방의 촌뜨기들이 어떻게 로큰롤에 자신을 순응시켜가는지에 관한 영화로 읽힐 수 있다.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뾰족머리와 뾰족구두는 로큰롤 스타일의 신경증적인 과장이다. 그 스타일은 로큰롤이라는 슈퍼 에고가 우리 내면에 엄청나게 큰 힘으로, 과도한 억압으로, 또 동경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들을 뒤쫓는 얼간이는 바로 그 뾰족한 머리가 없어서 ‘그들’이 될 수 없다. 세계 대중문화의 스타일들이 그 슈퍼 에고의 호명에 따라 줄을 선다. 그래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는, 마치 내면의 울림과도 같은 어떤 호명에 의해 미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그러한 중심부/주변부 논리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는다. 그는 한마디로 ‘길’의 개념으로 그 이분법을 뛰어넘고 있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는 멕시코로 가는 과정에서 미국의 유서 깊은 음악도시들을 들르는데, 예를 들어 테네시의 멤피스에서는 로커 빌리를, 또다른 도시에서는 컨트리를,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에서는 장례식 브라스 음악을, 또 어느 소읍에서는 바이커들을 만나 스티븐 울프의 하드록 <Born to Be Wild>를 소화한다. 그런 식으로 ‘그곳에 가면 그 음악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방식도 재미나다. 따지고 들면 로큰롤도 미국 백인들의 음악은 아닌 것이다. 단지 미국이라는 나라가 거기에 엘비스의 가면을 씌우는 전략을 통해 미국화시킨 것이다. 카우리스마키는 결국 멕시코로 가는 길을 택한다. 그렇게 멀리 북유럽에서 멕시코에까지 이르는 길의 음악들이 화해하는 대목에서 중심부/주변부 논리 속에서 아프게 형성된 가짜 슈퍼 에고의 가면이 벗겨진다. 그것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감탄하게 되는 대목이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