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Enjoy TV > TV 가이드
거리의 미덕 지닌 다큐멘터리 <한민족 리포트>
2002-01-03

담담한데, 가슴을 때린다

<한민족 리포트> KBS1 월 자정

10년 전만 해도 밤 12시 넘어서까지 TV를 시청하는 사람은 좀 유별난 축에 속했다. 밥먹기보다 TV 시청을 더 좋아하는 마니아거나, 아니면 밤 잠 못 이루는 올빼미족이라면 모를까? 보통 사람이라면 밤 10시 정도, 드라마 골수팬이라 해도 밤 11시까지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밤 11시 넘는 시간대는 ‘게토 타임’(ghetto time)이라며 ‘프라임 타임’과는 정반대의 명칭으로 불렸다. 생활 패턴이 바뀌면서 이제는 심야에 방송사 주력 예능 프로그램이 편성되는 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심야 시청이 아무리 일반화됐다고 해도 한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밤 늦게까지 TV를 보는 경우는 아직 드물다. 금요일 밤이라면 주말을 맞는다는 설렘과 느긋함으로 밤을 새볼 수도 있지만, 월요일은 아무래도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KBS1TV <한민족 리포트>의 방송시간은 월요일 밤 12시이다. 한참 부담스러운 방송시간만큼이나 완고함이 느껴지는 제목은 ‘윤리 교과서 같은 소리만 늘어놓는 지루한 캠페인성 프로그램이구나’라는 예단을 갖게 한다. 사실, 이른바 시청자를 계도한다는 공공성의 ‘미명’ 아래 제목에 ‘민족’이나 ‘무슨 무슨 리포트’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인 목적지향성 프로그램치고 가슴 울리는 감동을 주는 경우는 별로 없다. 제목도 70년 유신시대 분위기를 팍팍 풍기고, 방송시간도 마음 편히 시청하기는 그른 월요일 심야라는 점을 감안하면 <한민족 리포트>의 시청률이 한자릿수대에서 머무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청률이 프로그램의 품질과 가치를 재는 유일한 잣대는 아니다’라는 평범한 진리를 <한민족 리포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한민족 리포트>는 무척 감동적이다. 그리고 재미있다. 그 재미는 방송에서 다양한 영상 테크닉과 스타의 미소로 윤색되고 꾸며진 허구의 세계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흐뭇함이다. <한민족 리포트>는 해외에서 살고 있는 동포 중 그 사회에서 성공해 존경받는 이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이 성공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느냐에 이 프로그램만의 미덕과 가치가 있다. 어찌 보면 평범한 직장인이고, 소시민이지만 그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와 국가에서 뚜렷한 삶의 목표를 지향할 때 그들을 성공한 동포로 당당하게 소개한다.

미국 댈러스에서 거지들을 보살피는 황철희 목사나 로마에서 부랑자에게 따스한 음식을 제공하는 피자 아줌마 오수지씨처럼 그 사회도 외면한 소외된 이웃을 보살피는 이들이 있다. 재독 핵물리학자 김재일 박사나 캐나다 밴쿠버의 황승일 변호사처럼 편견과 차별을 뚫고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는 이도 있다. 그런가 하면 판소리를 강의하는 박찬응 교수나 지역사회의 가정의로 봉사하면서 한국의 음식문화를 알리는 데 애를 쓰는 이재선 박사 같은 이들도 있다. 또 안데스의 처녀농부 최유경씨나 아르헨티나의 골동품상 김운휘씨처럼 자신의 신념대로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분단 조국의 현실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재일 한국인 정갑수씨 같은 사람도 있다. 저마다 다양한 삶을 사는 이들이지만, 공통점은 얄팍한 눈앞의 이익이나 배타적인 민족성의 강조보다는 함께 어울리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한민족 리포트>는 이들의 삶을 신파적인 감수성으로 포장하거나 거창한 민족의 위대성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 사는군요’라는 투의 조금 건조할 수도 있는 차분한 카메라의 눈과 내레이션은 오히려 보는 이들이 그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가급적 지나치게 밀착하지 않고 일정한 관찰자의 시점을 유지하는 카메라의 ‘안정적인 거리감’은 요즘 VJ 프로그램들이 자주 범하는 촬영자의 불필요한 관여가 없어 깔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프로그램에 소개되는 삶이 주는 강한 울림이다.

자신의 형이 부랑자를 구제하다 처참하게 살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픈 몸을 이끌고 미국 댈러스에서 거지들의 재활을 위해 노력하는 황철희 목사의 모습에서 나는 어느 사업가나 명사의 ‘성공시대’보다 더 가슴 벅찬 감동을 느낀다. 시청률 40%를 넘나드는 대하사극과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한 시청률이지만 <한민족 리포트>에는 그 수치의 몇십배에 달하는 가치가 있다. 매주 이런 감동과 재미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월요일 밤의 TV 보기는 다음날의 부담을 감안하더라도 가치가 있다. 김재범/ <스포츠투데이> 기자 oldfield@st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