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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영화]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볼로뉴 숲의 여인들>
2002-01-03

지루함 혹은 성스러움

Les Dames Du Bois Boulogne 1945년 감독 로베르 브레송 출연 마리아 카사레스 <EBS> 1월5일(토) 밤 10시

요즘은 거의 사어(死語)가 된 것 같지만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표현이 있다. 훌륭한 질적 수준을 지니고 있음에도 상업적으로 실패를 면치 못한 영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볼로뉴 숲의 여인들>에 같은 표현을 써도 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초기작인 이 작업은 제작자 라울 플로캥을 파산상태로 몰아넣었고 감독에게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료함을 견디게끔 강요한 바 있다. 브레송 초기 걸작 <시골 사제의 일기>(1951) 이후 앙드레 바쟁은 <볼로뉴 숲의 여인들>에 대해 “문학과 리얼리즘의 상호작용에 의해 엄밀한 미학적 추상화에 도달하려는” 시도로 재평가한 바 있다. <볼로뉴 숲의 여인들>은 브레송 감독이 이후 추구했던 개인적인 테마, 그리고 영화적 스타일을 앞서 보여줬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영화는 디드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엘렌느는 연인 장이 자신에게서 멀어진다고 느낀다. 엘렌느는 한 가지 꾀를 떠올린다. 장에게 크나큰 불행을 선사하겠다는 결심이다. 엘렌느는 우연인 척 가장한 채 장에게 아네스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소개한다. 장은 아네스와 꿈같은 사랑에 빠지고 곧 결혼식을 올린다. 연인들이 가장 행복한 순간에 달했을 때, 엘렌느는 남자에게 지옥을 보여준다. 아네스에겐 한때 매춘을 했던 과거가 있음을 알리는 것.

초기 브레송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문학 텍스트를 충실하게 영화로 재현하는 점이다. <볼로뉴 숲의 여인들>도 다르지 않은데 소설의 단락이나 미세한 대사의 톤마저 스크린으로 옮기려는 시도가 눈에 띈다. 이 시도는 배우 연기를 통제하고, 그들 심리를 외부로부터 격리시키고 닫는 역할을 한다. 엘렌느 역의 마리아 카사레스는 거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 없이, 한 남성에게 복수극을 꾸미는 여성으로 분한다. 온통 누아르풍 분위기가 팽배하는 영화에서 완벽한 악녀가 활개치는 거다. 표정 변화마저 거의 없는 엘렌느의 복수극은 멀찌감치서 구경하기조차 힘겨울 지경이다.

<볼로뉴 숲의 여인들>은 이후의 브레송 영화보다 화려하고 장식적이다. 영화음악은 과장되어 있으며 카메라 움직임도 자주 발견된다. 그럼에도 연기는 건조하고 심지어 지리하다. 놀라운 건 영화 후반이다. 아네스라는 인물이 서서히, 하지만 당돌할 정도로 아름답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장은 결혼식장에서 소문을 듣고 불결한 여인을 다그치고 심문한다. 여인은 곧 기절한다. 그리고는 하얀 면사포를 뒤집어쓴 채 침대에 누워 남성에게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눈물을 흘리며 사랑과 희생에 대해 주옥같은 대사를 읊기 시작한다. 이 장면의 시각적 눈부심은 찬탄을 불러일으키고, 기이한 성스러움을 내뿜는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