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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리1
2002-01-03

집요함의 매력

게임의 원형이 무엇인가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마다 게임에서 원하는 것이 각각이고, 제작자 역시 저마다 게임을 통해 표현하고 싶은 것이 다르다. 게임의 볼륨이 커지면서 이를 찾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장르가 혼합된 하이브리드 장르가 아니라도, 게임 하나가 단일한 경험에 집중하는 경우는 점점 찾기 힘들어지고 있다. 오히려 고의적으로 이런 걸 배제하는 게 요즘 경향이다. 어떤 게임은 이게 지나쳐, 조미료를 너무 많이 넣어서 정작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는 요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벌써 8편까지 나온 <위저드리> 1편을 다시 플레이했다. 출시된 지 20년이 지난 게임이다. 이 게임은 되도록 많은 게이머를 끌어들이겠다는 백화점식 전략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 <위저드리>는 던전 롤플레잉 게임이다. 자기가 사용하고 싶은 캐릭터를 만든다. 그리고 만들어진 캐릭터 풀을 바탕으로 함께 모험을 할 파티를 구성한다. 처음에 주어지는 돈으로 무기와 장비를 산 뒤 던전에 들어간다. 그리고 던전을 탐험하면 된다. 목적을 달성했거나 혹은 그만 지쳤을 경우 마을로 돌아와 돈을 나누고 해산한다. 모험을 하다보면 경험이 쌓여 레벨이 높아지고 돈도 모을 수 있다.

단선 진행이라서 어디로 가서 뭘 해야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 캐릭터를 어떻게 키워 직업을 어떻게 바꿀지만 생각하면 된다. 그 흔한 미니 게임 하나 없고, 게임 진행에 감초처럼 들어가 있는 유머러스한 연출이나 힌트, 이벤트도 없다. 그저 나와 동료들, 그리고 던전과 몬스터뿐이다. ‘오토 맵 시스템’도 물론 없다. 시작하기 전 미리 연필과 모눈종이를 준비해서 직접 지도를 그려가며 탐험해야 한다. 지도를 잘못 그리면 던전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죽을 뿐이다.

그리고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이른바 세이브-로드 노가다를 이 게임에서는 할 수 없다. 위저드리의 세계의 캐릭터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모두 연대기에 기록된다. 죽으면 그 캐릭터는 끝이다. 마법으로 살려낼 수는 있다. 하지만 엄청난 돈이 든다. 게다가 언제나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실패하면 캐릭터는 재로 돌아간다. 더 많은 돈을 들여 더 강한 마법으로 살려내는 방법밖에 없다. 물론 이번에도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다.

한방에 죽을 위험은 레벨이 높아져도 여전히 존재한다. 초반에만 고전하면 그 다음부터 편한 진행이 보장되는 게임들과는 다르다. 아무리 레벨이 높아도 어느 한순간 트랩에 걸려 전멸할 수 있다. 파티가 한명도 남지 않고 전멸하면 물론 게임오버다. 이번에는 마법이고 뭐고 없다.

<위저드리>는 게이머의 인내를 시험하는 게임이다. 단순한 패턴이 반복되는 가운데, 한번이라도 실수하면 가혹하게 게임 밖으로 밀려난다. 게이머의 환심을 사려는 자세는 전혀 없다. 그리고 이 단순한 패턴 속에 ‘던전 탐험과 성장’ 논리를 집요하게 집어넣는다. 던전에는 싸움밖에 없다. 싸우다보면 레벨이 올라간다. 그러면 또다른 던전이다. 제작자의 집요함에 게이머는 순수한 집념으로 맞서야 한다.

<위저드리>처럼 게이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게임은 사실 문제가 있다. 이 게임은 극소수의 마니아만을 위한 게임이다. 하지만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고 피를 토할 듯 달려드는 제작자와 순수하게 몸으로 부딪히는 게임이기도 하다. 이 진한 피 냄새를 중화시킬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들은 아무 데도 없다. 이렇게 나눈 진지한 경험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