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쾌락주의자 김영하와의 잡담, 농담, 진담 (2)
2002-01-03

난 싫다 남성적인 것, 정치, 축구, 도박이

“세상엔 엄숙한 가짜가 너무 많아”

뜻밖에도 그는, 영화와의 친연성을 부인했다. <개와 늑대의 시간> 시나리오를 쓴 것도 이재한 감독이 6개월 동안 끈질기게 청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신 그는 “모든 인간은 그가 읽은 책의 총체”라고 믿을 만큼 책을 좋아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는 동서, 고금, 장르를 망라한 수십개의 저서들을 입에 올렸다. <난중일기>에서 <발레이야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하까지. 그는 영락없는 인문주의자, 고전주의자였다. 미술도 현대미술보다 르네상스나 중세 화가들의 회화를 좋아했다. 예컨대 <나는 나를…>은 신고전주의 화가 다비드의 그림 <마라의 죽음>에서 시작해 들라크루아의 <사루나디팔의 죽음>으로 끝난다. 반면 그는 만화나 무협지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그가 <무협학생운동>을 썼다. 역설의 연속. 우리가 특정인에 대해 피상적으로 갖는 이미지가 얼마나 허약한가를 확인하는 순간의 연속이다. 아무튼 간에. 그가 <무협학생운동>을 쓴 경위는 이러하다. 1992년 그는 하이텔에 원고지 4매 분량의 무협지 같은 글을 올렸는데, 어느 출판사 사장이 무협지로 학생운동사를 써보면 어떻겠냐고 제의를 해왔다- 그때 그는 어른이 되어서는 처음으로 무협지를 읽었다고 한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소설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뒤 그는 한 시사월간지 기자(현 <씨네21> 편집장)의 청탁으로 당시 정치현실을 빗댄 무협지 <대권무림>을 썼다. 그러다 그는 ‘대형사고’를 쳤다. 김영삼 대통령 집권 초기에, 겁도 없이 “청와대에서 조깅하던 김영삼 대통령이 총에 맞아 살해됐다”로 시작되는 정치소설을 쓴 것이다. 이 소설은 무려 11개 일간지에 박스 기사로 실렸고, 일개 대학원생이던 그는 현직 국무총리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사건이 수습될 즈음 그는 방위로 군대에 갔는데, 아무도 이 김영하가 그 김영하인 줄 몰랐던 게, 돌이켜 생각하면 커다란 행운이었다.

<무협학생운동>을 썼을 때 반응은.

친구들이 그 책 보고 불쾌해했다. 난 그런 엄숙함이 싫다.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나. 엄숙한 가짜들이 정말 많다. 현대소설의 중요 정신이 바로 웃음의 철학이다. 웃음 싫어하는 사람은 문학의 적이다. 전체주의는 유머를 추방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난 즐겁게 살려고 한다. 영화계에 장진처럼 ‘재미있게 찍었으니 재미있게 봐라’, 이러는 감독 많지 않다. 웃고 즐길 영화를 만들고도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냥 ‘그래, 나 똘아이다’라고 말하면 안 되나. <씨네21>도 지나치게 진지하다. 이러다 한국영화 망하지 않을까 걱정은 많이 하면서 영화 보기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소설들을 보면 상상력이 없는 인간을 못 참는 것 같다.

상상력이 없는 인간이 아니라 상상력을 억압하는 인간을 못 참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력을 기발한 재주 정도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상상력은 정치의 문제다. 상상력이 작동하려면 자기검열이 작동하지 말아야 한다. 내면화된 기준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상상력은 커가지 않는다. 결국 상상력은 기존 체제를 승인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느긋하게, 고양이처럼

<흡혈귀>는 그의 소설 가운데에서도 상상력의 농도가 짙은 축에 드는 작품이다. 작중 화자 ‘나’는 “아무래도 내 남편은 흡혈귀같다”라고 쓴 한 여성의 편지를 공개한다. 시나리오를 쓰는 남편을 흡혈귀로 의심하던 그녀는 “세상의 모든 흡혈귀는 거세당했다. 세상은 빛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흡혈의 자유와 반역의 재능을 헌납당했고, 대신 생존의 굴욕만을 넘겨받았다”라는 메모를 보고 이를 확신한다. 그러면서 “남편과 그의 동료들은 살아남기 위해 본능을 상실하고 빛에 적응해왔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 흡혈귀의 소외감은 그 자신의 내면을 반영하는지 모른다. 그는 ‘뿌리뽑힌 자’, 아니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자’ 같다. 들뢰즈의 언어대로 말하면 그는 ‘유목민’이며, 경계에 서서 끊임없이 ‘탈주의 선’을 찾는 자다.

그는 ‘별볼일 없는 것’을 좋아한다. 명종조의 인물 아랑을 등장시켜 <아랑은 왜>를 쓴 것도, “그 시대, 그 인물이 별볼일 없어서”다. 그 별볼일 없는 것과 더불면서, 그는 즐거움을 누린다. 그는 스스로를 “에피큐리안”(쾌락주의자)이라고 했고, 즐겁게 살고 싶다고 했으며, 실제로 끊임없이 그 방법들을 찾고, 만들고 있다. 흔히 경쾌함이 가벼움, 천박함으로 오해되는 시대를 살면서, 연애마저 개인의 사사로운 욕망이라며 금기시되던 시대를 지나오면서, 그는 생기(生氣)를 잃지 않았다. 그런 탓에 80년대에는 리버럴하다는 이유로 운동권 안에서 비난받기도 했다.

사실 우리는 인간의 원초적 즐거움이랄 수 있는 ‘아름다움의 즐거움’, ‘즐거움의 아름다움’을 너무 오랫동안 억압당하고 살아왔다. 그는 그런 분위기를 승인하지 않으려고 ‘고집부린다’. 그 고집은 근엄한 인간들에겐 “나는 꼴통”이라는 선언으로 들리겠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자칭 타칭 아웃사이더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당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니다. 난 문화적 기득권자이다. 이미 많은 걸 가졌고 억울할 때 억울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이창을 쓸 때 누군가를 공격하고 싶고 일침을 가하고 싶은 욕구를 많이 느꼈다. 하지만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싶어 자제했다. 인사이더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비판과 자성의 능력이다. 소설 쓰던 초기엔 내가 아웃사이더가 아닐까 하는 자아도취에 빠지기도 했다. 내 소설이 한국소설 전통에서는 계보를 찾기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건방진 생각이었다. 내 소설도 이미 한국문학의 풍경 안에 들어와 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작가가 아웃사이더로 자리매김되면, 작가가 화제가 되고 작품은 사라진다. 마광수·이문열·장정일·샐먼 루시디가 그런 케이스다. 난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논쟁 안 하고 사고 안 치고 조용히 산다. 나는 사회에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다. 느긋하게, 고양이처럼 살고 싶다.

인사이더라고 하더라도 아웃사이더의 감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은가. 예컨대 모두가 ‘예’ 할 때 ‘아니오’ 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 그건 소설가에겐 기본이다. 언제나 의심한다. 신문 사회면을 보면서도 그 이면에 무엇이 있나를 생각하고. 난 심심한 걸 못 참는다. 주의가 산만하고 게으르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산다. 어느 친구가 그러더라, ‘넌 평범하게 사는 것 같은데 독특해’라고.

독특하다니, 어떻게.

나 생긴 대로 산다. 돈이 되더라도 재미없고 바빠질 것 같은 일은 안 한다. 아내가 심리학과를 나왔는데 나보고 그러더라, 콤플렉스가 별로 없는 인간이라고. 나처럼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드물단다. 열등감이나 콤플렉스 같은 결핍이 있어야 뭐든 열심히 하는 법인데, 난 꼬인 데가 없다는 거다.

“소설 쓰면서 좋은 사람이 돼가는 것 같다”

‘참 복받은 사람이군.’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고 일순 그가 부러웠다. 콤플렉스가 없는 인간, 상처가 없는 작가라니. 작품 안에 작가 내면의 공포, 광기, 불안, 살의와 투쟁을 벌인 흔적이 낭자하게 남아 있어 독자마저 섬뜩하게 하는 문학이 얼마나 많은가? 그의 소설에 ‘김영하’가 잘 보이지 않는 것도 납득이 됐다. 상처난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굳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니 순전한 상상력으로 극중인물과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사적인 체험을 소설로 쓰는 작가들은 상상력이 부족한 자들이며, 그들에겐 작가로서의 자질이 없다”라고 말했다. 김영하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작가다. 그래서 그는 상처를 까발려 연민을 구걸하는 작가들을 혐오하고, 지면을 빌려 “징징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많은 작가들에게 글쓰기는 자기표현이자 자기치유의 과정이다. 그런 작가들에게는 글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소설을 쓰지 않고도 별 문제없이 살 사람 같다.

내게 글쓰기는 운명의 구원은 아니지만 글쓰기는 나를 살아가게 한다. 소설 쓰면서 좋은 사람이 돼가는 것 같다. 또 글쓰기는 나를 타인과 소통시켜준다. 내 소설이 잘 읽힌다면 그건 나의 소통의 욕망이 깔려 있기 때문일 거다. 물론 좋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싶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김진명 소설의 팬들이 내 소설을 읽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작품과 작가는 별개라고 말한다. 하지만 독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소설 속에서 작가를 읽어내려고 한다. 당신과 가장 가장 가까운 인물은 누구인가.

<나는 나를…>이 나와 가장 가깝다. 나도 소설 속의 K처럼 사팔뜨기였다. 소설 속에 “사팔뜨기는 세상이 두 개로 보인다. 그리고 그 중 한 개를 선택한다”는 대목이 있는데, 내가 그랬다. 하지만 한 인물에 전적으로 투사된 건 아니고 여러 인물에 내가 녹아 있다. K가 차를 몰면서 속도에 열광하는 것도 나랑 같다. 한때 난 스피드에 매혹됐었다. 타나토스에 경도된 때였다. 고속도로에서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 어떤 우울, 공격성이 나를 지배했는데, 그것이 세상으로 향하지 못하고 나를 향했다. 자살은 나를 향한 공격 아닌가. 90년대 초반 좌파들이 좌표를 못 잡고 헤맬 때였다. 지금은 그런 공격적 허무는 없다. 하지만 허무의 기본 정조는 안 바뀌는 것 같다. 낙관적인 전망을 갖게 되질 않는다. 그게 나와 진보주의자들이 잘 안 맞는 부분이다.

그는 일년 전 담배를 끊었다. 건강 때문이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루의 모든 일과가 담배와 연관되어 있다는, 새삼스런 깨달음 때문이었다. 어딜 가도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곳인가 아닌가, 누굴 만나도 담배를 피우는가 아닌가 따지는 게 싫었다. 그래서 담배와 무관하게 살아보자고 결심했다. 누구에게 이건 싱거운 이유일지 모르나, 그에게는 절박하다. 더 중요한 건 이것이 ‘그만의 이유’라는 점이다.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는 “모든 인간에겐 그만이 완성해야 할 자아의 신화가 있다”고 했다. 김영하는 ‘자기대로’ 살면서 그만의 신화를 찾아가고 있다. 경쾌하고 즐겁게, 가끔은 함께 놀자고 손짓도 하면서. 잠시 쉬게 해준 다음, 또 꼬셔서 쓰게 해야지, 라는 지겨운 직업병의 아우성을 들으며 그와 작별인사를 나눴다. 글 이유란 fbird@hani.co.kr·사진 이혜정 hjlee@hani.co.kr▶ 쾌락주의자 김영하와의 잡담, 농담, 진담 (1)

▶ 쾌락주의자 김영하와의 잡담, 농담, 진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