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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3 손원평이 사랑하는 드라마
2002-01-03

살며 기뻐하며 절망하며

사랑이 눈뜰 때 Hin Helgu Ve

감독 흐라픈 군라프슨 출연 알다 사귀다도티, 스테인 마티에이슨 제작연도 1993년 출시사 SKC

사랑이라는 로맨틱한 베일 뒤에 숨어 있는 은밀한 성적 유희는 어린이들에게는 괴이한 악마적 행위로 비쳐질 수 있다. 어쨌거나 이 7살짜리 남자아이의 연상의 여인에 대한 사랑 표현법은 참으로 감미롭다. 그는 그녀의 그림을 그리고 그녀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며, 야수의 변태적인 농간에서 그녀를 구해내기 위해 바이킹의 도움을 얻고자 한다. 다만 그는 아이일 뿐이다. 그녀가 야수의 농간을 즐긴다는 것은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분명히 사랑에 빠져 있지만 사랑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그의 사랑은 유아적인 것으로 홀대받는다. 주인공 게스터의 여자친구 콜라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겨우 9살쯤 됐을까 싶은 이 아이의 오르가슴 패러디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멕 라이언을 능가할 정도로 놀랍다. 그러나 그녀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그녀 역시 아직은 그런 행위를 저질스런 코미디 정도로밖에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욕의 고향 아이슬란드의 다소 거칠고 황량한 자연을 배경삼아 두 아이가 던지는 원반의 포물선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들은 성장할 것이고, 성장은 다소 과격하지만 친절하게, 그들을 새로운 사랑으로 안내해줄 것이다.

신으로부터의 뉴스 Des nouvelles du bon Dieu

감독 디디에 르 페쇠르 출연 마리 트린티그넌트, 마리아 드 메데이로스 제작연도 1996년 출시사 스타맥스

만화가의 붓을 피해 달아나는 초창기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 감히 만화가에게 반항하거나 무언가를 요구했다가는 캐릭터들은 영락없이 우스꽝스런 몰골로 그려지거나 심지어는 지우개로 지워지기까지 하는 무시무시한 처형을 받는다. 그러나 거만한 만화가도, 그걸 지켜보고 앉아 있는 우리도 모두 변변찮은 3류 소설의 등장인물이었으니, 책의 제목은 인생이요 저자는 신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율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작가인 신의 농간일 뿐. 나아가 이 세상 자체가 거대한 뻥튀기 요지경이라는 건 너무도 자명한 사실. 자유를 달라. 스스로를 서술할 권리를 달라. ‘작가와의 만남.’ 그러나 아, 제발! 어딘가에 처박혀 읽히지도 않을 팬레터, 들리지도 않을 혼잣말 같은 기도 따위가 아닌 진정한 작가와의 대담을 원한다! 우리를 무시하겠다고? 좋다, 파업이다. 그러나 모든 게 부질없는 짓. 신이라는 빈털터리 작가조차 또다른 소설 속의 꼭두각시 배우일 뿐이니까. 굳이 벽을 뚫고 책장 밖으로 튕겨나가려고 애쓸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신이라는 등장인물을 조종하는 작가가 내가 쓴 책 속 등장인물일 가능성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요리사와 세 남자 My Rice Noodle Shop

감독 사연 출연 유방, 장종제, 하군 제작연도 1998년 출시사 스타맥스

꿈처럼 영롱했던 과거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채 장마비만큼 구질구질한 현실에서 요리사 여인과 세 남자는 오늘도 파리 날리는 국숫집을 지키고 있다. 이들의 어정쩡한 정(情)은 사무적인 관계가 훨씬 득이 됐을 요리사에게 매번 애매한 책임감만을 떠맡길 뿐이다. 그러나 세 남자가 아스라이 사라지고 만 뒤에도 요리사는 슬퍼하지 않는다. 엉뚱하게도 그녀는 과거를 꿈꾼다. 그녀의 미래는 오로지 찬란했던 지난날에서 그 희망의 빛을 얻는다. 기억의 창고에 자꾸만 쌓여가는 고단한 삶의 자국들을 파헤치고 그녀는 과거를 요리한다. 다시 한번 미래를 만들어내기 위해.

드레스 De Jurk

감독 알렉스 반 바르머담 출연 알렉스 반 바르머담, 헨리 가르신, 리키 쿨 제작연도 1996년 출시사 시네마트

“나를 입어보세요, 나를 가져보세요. 그동안 나는 당신을 관찰할게요.” 여기 등장하는 다소 튀는 디자인의 옷은 사실 좀 건방지다. 이 옷은 마법사의 주문이 깃든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마법 드레스가 아니라, 우연히 채택되어 공장에서 다량으로 찍어낸 기성품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람들을 유혹하고는 그들의 감춰진 욕망을 맛본 뒤 작별인사도 없이 다음 타자를 선택한다. 예상과는 달리, 사람들은 옷으로 인해 커다란 변화를 감지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언제나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고 옷은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이었음을 알게 될 뿐이다.

미세스 브라운 Mrs. Brown

감독 존 매든 출연 주디 덴치, 빌리 코널리, 제프리 팔머 제작연도 1997년 출시사 브에나비스타

왕실의 스캔들.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젠 백작의 로맨스와는 달리, 남편을 잃고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50이 다 된 빅토리아 여왕에게는 다만 진실하고 우직한 친구가 필요했던 것뿐이다. 따라서 <여왕 마고> 등에서 보이는 퇴페적이며 방종한 프랑스 왕실과는 달리 18세기 영국의 왕실과 그에 얽힌 스캔들은 아주 건조하게 거리를 둔 채 서술된다. 영화 안에서 드러나는 영국 의회와 왕실의 독특한 관계도 주목할 만한 이야깃거리다.

미스 플라워 I Love You, I Love You Not

감독 빌리 홉킨스 출연 클레어 데인즈, 잔 모로, 주드 로 제작연도 1996년 출시사 우일

영화가 시작되고 비디오에 한글자막으로 ‘제니 모리’라고 이름이 뜨는 배우가 잔 모로임을 알아두자.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배가 불룩 나온 할머니가 되어버린 누벨바그의 연인은 이제 막 사랑에 눈뜬 소심한 손녀 클레어 데인즈에게 좀더 무모해지라고 충고한다. 다행히 손녀는 풋사랑에 대한 뻔한 고민뿐 아니라 20세기를 뒤흔든 역사적 사건에 대한 후유증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영화는 그녀의 이 두 가지 고민 그 어느 쪽에도 너무 깊숙이 파고들지 않기 때문에 현명하다. 영화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새에 그녀는 스스로 치유되고,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미소짓는 법을 혼자서 배워나간다.

제이콥의 거짓말 Jakob the Liar

감독 피터 카소비츠 출연 로빈 윌리엄스, 앨런 아킨 제작연도 1999년 출시사 콜럼비아

내게 거짓말을 해봐. 사람들은 속삭인다. 잔뜩 부풀어진 기대감을 가지고서. 마침내 거짓은 사실적인 드라마가 되고, 진실 역시 거짓을 믿는 채로 다락방 안에 갇혀 있다. 그러나 결국 거짓말쟁이는 한마디 변명도 못한 채 거짓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결코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 적어도 그 점은 거짓이 끝내는 진실로 둔갑할 여지를 남겨놓았다. 거짓말처럼 진짜가 되었다, 라는 말 속에 숨은 심리.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의 거짓을 원한다. 거짓이 진실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을 때 거짓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변신하여 삶에 대한 애착을 만들어낸다.

뷰티풀 걸 Beautiful Girls

감독 테드 드미 출연 맷 딜런, 우마 서먼, 내털리 포트먼, 미라 소비노, 티모시 허튼 제작연도 1996년 출시사 시네마트

아름다운 미지의 여인와의 설레는 첫 만남.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사랑에 지친 남자들은 오히려 사랑에 대한 근원적인 환상을 꿈꾼다. 이는 대부분 익숙해진 사랑에 대한 ‘나 갖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까운’ 도둑놈 심보에서 연유하지만 그러한 환상조차 결국은 일상 안으로 포섭된다. 맷 딜런, 미라 소비노, 우마 서먼이 출연하며, 특히 내털리 포트먼의 조숙하지만 귀여운 연기가 사랑스럽다. 극적인 골인으로 이어지는 영화적인 사랑의 상투성에 물들지 않은 채 이 영화는 담담하게 속삭인다.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이미 당신의 곁에 있다”라고.

아름다운 사람들 Beautiful People

감독 자스민 디즈다르 출연 샬로트 콜먼, 찰스 케이, 로저 슬로먼 제작연도 1999년 출시사 시네마트

화해하십시오. 화해하면 우리는 모두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의외로 이렇게 교훈적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나름대로 심각하면서 우스꽝스런 이야기들은 상당히 산만해 보이지만 지구촌 이웃사랑이라는 동일한 모토의 각기 다른 에피소드일 뿐이다. <트레인스포팅>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비밀과 거짓말> 등에서 보이는 영국적인 인물 유형들이 모두 등장하는 이 영화에는 엑스트라가 없다. 엑스트라인 듯하던 인물의 삶은 다른 에피소드에서 매우 따스한 손길로 중요하게 부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코 한자리에서 만나지는 않지만 서로 어디에선가 미세하게 스쳐지나가 흐릿해지던 그들의 얼굴은 마침내 한데로 모아져 아름다운 미소를 만들어낸다.

28일 동안 28 Days

감독 베티 토머스 출연 샌드라 불럭, 비고 모텐슨 제작연도 2000년 출시사 콜럼비아

중독이란 얼마나 달콤한 것인가. 몽롱하고 흐릿한 세계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이제는 거울을 볼 때가 왔다. 닦아도 닦아도 흐릿한 당신의 모습은 당신 자신의 책임이다. 현실의 따가운 햇볕이 충혈된 눈을 찌를지라도, 각종 기억의 단편들과 함께 밀려오는 반성과 가족에 대한 기억이 쓰디쓴 눈물을 만들어내더라도, 달콤했던 과거의 망령에 대한 그리움이 수전증을 유발시키더라도, 이제 당신은 변해야 한다. 28일, 그것이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다. 정녕 변하고 싶다면 선택하고 인내하라. 결단 내리고 실행하라. 우리가 당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보다도 많은 것을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손원평/ 영화평론가 thumbnail@freechal.com▶ part1 김봉석이 뽑은 B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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