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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스의 얼굴, 조재현 [1]
사진 오계옥최수임 2002-01-03

이 남자 흉포하다... 연약하다

“나는 대중과는 사이가 멀다고, 항상 생각했어요. 일반 관객과 나는 별개라고. 때로는 그렇게 생각하면 편안하고 자유롭기도 했지만, 음… 열등감 같은 것도 있었죠. 어쨌거나 너는 너, 나는 나. 이렇게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그런 ‘네’가 다가와 ‘내’ 손을 살포시 잡은 거예요.”

“<나쁜 남자>에서처럼, ‘내’가 휙 돌아서서 ‘너’를 갑자기 안아버린 게 아니구요?”

“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강제로 키스했는데 혀가 쑥 들어온 경우라고 볼 수도 있겠어요.”

조재현이, 웃는다. 요즈음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강제로 키스했는데 혀가 쑥 들어온 거라는 다분히 그다운 비유를 들면서 미소 한번, “좋으시죠?”라는 간지럼태우는 듯한 물음에 “그럼요. 기분 무지하게 좋아요” 하며 입이 귓가에 걸리기를 또 한번.

그도 그럴 것이 조재현은 요즘 12여년 연기생활 중 가장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악어>나 <야생동물보호구역>은 물론, <섬>과 <수취인불명>이 개봉했을 때도 극장에서 그를 만나지 않았던 이들이 한억관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에게 뒤늦은 사랑고백을 하고 있다. <피아노>라는 드라마가 그를 ‘띄운’ 뒤, 12월 한달 동안 조재현은 20여개의 인터뷰를 각종 언론과 했고, 인터넷에는 ‘SBS 조재현 연기대상 추진위원회’도 결성돼 있다. 탤런트 인기순위 1위라니, 방송사 복도에서 만나는 동료 선후배마다 악수를 청하며 “잘 보고 있습니다. 축하드려요”류의 인사를 건네는 것도 당연하다. 게다가 최근작 <나쁜 남자>의 베를린행까지. 좋은 일들의 행진. 그래서 조재현은 웃는다. 그러나, 마냥 웃는 것은 아니다. “기분 무지하게 좋아요. 좋긴 좋은데…” 하고 그의 말은 이어진다. “좋긴 좋은데 이게 없다고 어떻게 된다, 뭐 그런 건 아니에요. 워낙 오랫동안, 이쪽과는 친하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물론 좋긴 하지만.”

밝게도 어둡게도 될 수 있는 명암의 얼굴

1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배우 조재현에게 ‘대중’은 짝사랑의 상대보다도 더 먼 존재였다. 드라마에선 대개 코미디 양념을 주는 조연이었고, 영화도 흥행작은 없었다. ‘컬트’ 수준의 관객만을 모았던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악어> <야생동물보호구역>, 베니스까지 갔지만 여전히 흥행은 잘되지 않았던 <섬>과 <수취인불명>. “짝사랑이 아니라, 완전히 버려진, 사생아 같은 느낌”이었다는 게 그의 표현이다. 오랫동안 그는 인기라는 건 마음에서 접고 있었다. 그게 그의 연기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렇게 걷고 있는 길 위에서 만난 지금의 인기. 조재현은 반가우면서도 담담하다. 어색하지도 않게, 그렇다고 호들갑스럽지도 않게, 그는 조금은 다른 시간을 맞았다.

조재현은 독기와 친절함이 섞여 있는 묘한 사람이다. 원초적인 ‘남성’을 느끼게 할 만큼 터프한 이면, 거친 것에 대한 아주 고른 톤의 감성을 갖고 있고, 아픔을 표현할 때도 쉽사리 약함을 내비치지 않는다. “강한 연기와 코믹한 연기, 내 연기는 이렇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죠. 내 성격은 그 중간임에 틀림없어요. 그래서 이쪽저쪽 모두 하기가 편해요”라는 말대로, 그는 밝게도 어둡게도 될 수 있는 명암을 얼굴에 지니고 있다. 몇초만 인상을 굳히고 있으면 쉬 어둠 속으로 침잠되고 그 속에서 인광의 번득임을 비치는가 하면, 반대로 약간의 장난스런 혹은 얼빠진 표정만 지어도 언제 힘이 들어가 있었냐는 듯 쓸쓸하면서도 코믹해지는 얼굴. 어둠에서 비롯했기 때문에 약함과도 통하는 강함이랄까,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일련의 정서가 담긴 조재현의 얼굴은 볼수록 묘하다. 그건 꼭 그의 최근작 <나쁜 남자>의 한기 같다. 백주 대로변에서 여대생에게 강제로 키스를 한 뒤 작당을 해서 그녀를 사창가로 넘겨버리고 비밀 창을 통해 그녀를 훔쳐보며 혼자 사랑하는 사창가 깡패 한기, 강함 속에 뭔지 모를 아픔이 있는 인물. 울지 않지만, 후두에 상처를 입어 속마음도 고작 쉰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을 뿐이지만, 독하고 나쁜 이면에 말할 수 없는 약함을 지니고 있는 한기는, 어딘지 조재현을 닮았다. “너 한번 뒈지게 맞아라, 한번에 끝나게. 포장마차 걷어차고 부하 깡패들을 때리던 장면 있잖아요. 그걸 찍을 때 내가 그랬어요. 그리고는 정말 굉장히 세게, 엄청 세게 때렸어요.” “그래요. 분명히. 나한텐 나쁜 남자 같은 기질이 있어요. 사람마음이 선과 악만 있진 않죠. 악적인 선도, 선적인 악도 있어요. 희로애락 중에서 희만 나를 움직일 때가 있듯이, 악만 갖고 내가 움직일 때도 있어요.”

나쁨에 대해, 그리고 순간적으로 자신의 ‘나쁜 남자’의 기질을 내보인 걸지도 모르는 <나쁜 남자> 영화 한 장면에 대해, 조재현이 하는 이야기다. 때리면서, 강하다며 누군가를 ‘뒈지게’ 패면서 약해지는 나쁜 남자 한기의 속내는 그대로 조재현 자신의 것. ‘강한’ 눈빛이 인상적인 이 배우의 눈은, 아닌게아니라 잘 보면 양쪽의 표정이 다르다.

옆집 고기냄새가 괴롭던 산동네 아이

조재현은, 짐작되다시피, 그의 삶 자체가 명암을 한데 품은 것이었다. “새마을운동을 하고 88올림픽을 하고, 대한민국이 지나온 과정을 다 거쳤다”는 그의 성장기는 산동네로부터 시작한다. 어릴 적 아버지가 종로통의 요식업 사업가로 성공하기 전, 조재현은 가난한 시골 산동네 아이였다. 윗집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고기를 구우면, 그리고 그 냄새가 “반경 50가구쯤에 퍼질 때면” 너무나 괴로웠던, 양아치 ‘형’들과 어울려 패싸움도 하곤 하던 소년.

소년기를 벗어날 무렵에는 돌연 자가용을 타고 등교를 할 만큼 집이 부유해진, 그의 성장기는 정말 한국사회의 축소판 같다. 십대가 되고 가정형편은 좋아졌지만, 사춘기 시절, 그는 다른 의미로 어두운 청소년이었다. “집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라는 그 시절, 조재현은 흔히 말하는 ‘문제아’였다. 반항했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림그리기를 좋아했고 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예고입시를 준비하며 시작한 뎃생은 재미없었다. 그무렵 이강백의 <결혼>이라는 단막극을 보고 연극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그러다 예고입시. 면접 때 아버지가 뭐하시냐는 질문에, “화가이십니다”라고 말하던 앞차례 학생 다음 그는 “술집하십니다”라고 말해버렸다. 그것 때문은 아니겠지만 낙방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그는 부산 을숙도로 먼 가출을 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는 웨이터로 ‘취직’해 돈을 벌었고 검정고시 책을 사서 공부를 했다. 검정고시에도 떨어졌고 서울로 돌아와 어렵사리 학교를 마쳤다. 어린 시절 산동네만의 패거리들을 알았던 ‘산동네 정서’와 이렇듯 질풍노도처럼 몰아쳤던 사춘기는 조재현의 연기에 항상 스며났다.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의 절름발이 새우잡이 선원, 한강변에 살며 자살자의 시체를 거래하는 <악어>의 부랑자 청년, <섬>의 다방 포주, <수취인불명>의 쇠락한 미군부대 마을 개장수. 그에게 주어졌고 그가 선택했던 인물들이 이렇게 다들 쓸쓸하다 못해 지저분하고 잔혹했던 것을 그저 우연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춘기 조재현의 집 밖의 생활은 그가 부산의 경성대 연극영화과로 대학진학을 하며 자연스레 이어졌다. “1, 2학년은 부산에서 놀 수 있는 문화를 양껏 즐겼고, 3, 4학년 때는 연극을 했다”라는 게 그의 간단한 대학생활 요약이다. ‘점잖은’ 요약이기도 할 것이다. ‘놀던’ 가락은 대학생활 절반 즈음 동안 계속됐고, 그 중간쯤 되는 3학년 여름방학 때 조재현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 조재현이 음에서 양으로 돌아선 계기”를 맞았다. 대학 3학년 여름방학, 그쯤 되면 듣게 되는 너무나 상투적인 말, “선배님, 졸업하면 뭐 할 거예요?”라는 후배의 말 한마디에 그는 “명쾌하게 답을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삭발을 했다. 그리고 연극판을 벌였다.

뒤에 <내 안에 우는 바람>(1997)을 연출한 당시 선배 전수일씨에게 기획, 과대표에게 연출을 맡기고 당시 학내 최다 주연배우였다는 조영진씨를 끌어들여 자신이 출연하는 2인극 <아일랜드>를 준비한 것이다. 서울 집에다 여름학기를 다닌다며 받은 30만원을 죄 제작비로 투입했다. <아일랜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억울하게 체포된 흑인죄수 2명이 감옥 안에서 <안티고네>를 연극무대에 올린다는 내용의 번안극. 죄수들이 놓인 상황이 극중극 <안티고네>의 안티고네에 대한 크레온의 단죄와 겹쳐지면서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긴다.

이 작품을 하며 그는 연기라는 것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됐고, 사춘기 이후 집 밖, 혹은 학교 밖을 나돌던 ‘음지생활’을 마감, ‘양지’로 들어섰다고 회상한다. <아일랜드>의 극 스토리는, 그가 인터뷰 중에서 가장 길고 자세하고 열성적으로 이야기한 대목이었다. 그는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깊이 동화됐던 그때의 자신에게 아직도 강하게 이입돼곤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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