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벌교에서 전학‘와분’ 소녀가 스크린을 평정했다. <써니>는 심은경이라는 이름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영화다. 순수하고 씩씩한 전학생 임나미 역을 맡아 서울말과 전라도 사투리가 어설프게 뒤섞인 화법을 맛깔나게 구사하는 그녀가 없었다면, 눈을 희번덕이거나 막춤을 추며 제대로 망가지는 그녀가 없었다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관객을 금세 울려버리는 그녀가 없었다면 <써니>는 훨씬 밋밋한 영화가 되었을 거다. 최근 몇년간 <핸젤과 그레텔> <불신지옥> <퀴즈왕> 등에 출연하며 아역배우의 틀을 벗어나고 있던 심은경에겐 <써니>가 진정한 성장의 출발점인 듯하다. 늘 의지했던 어머니보다 강형철 감독을 가까이 하고, 미국 유학을 잠시 늦추며 참여한 이 영화로부터 열일곱 사춘기 소녀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유학차 미국 피츠버그에 머물다 잠시 귀국한 심은경을 만났다.
-보통 미국 가면 몸무게가 는다고들 하는데, 예전보다 더 말라 보인다. =나도 살이 쪘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국에 오자마자 엄마가 찰싹 때리며 “이게 뭐야, 너무 말랐어” 하시더라. 만나는 분들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미국에서도 잘 먹었는데!
-유학 생활은 어떻나. =친구네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있다. 처음 갈 때는 미국 하이틴영화에서나 볼 법한 풍경들을 떠올렸는데, 막상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 친구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엄격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점에서 미국 학교에 대한 환상이 많이 깨졌다.
-유학은 어떻게 결심하게 된 건가. =우선 작품을 6년간 쉼없이 해왔기 때문에 내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배우고 느끼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유학을 생각하게 되더라.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과감하게 결정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학교를 옮기면서 <써니>의 전학장면이 떠오르진 않았나. =확실히 내게서 나미 같은 모습이 조금씩 보이더라. 영어도 아직 부족하다보니 행동도 어수룩하고. 하루는 자습시간인 줄 알고 다른 데 갔다가 반 친구가 나를 찾으러 온 적도 있다. (웃음)
-학급에 한국 친구도 있나. =없다. 나 혼자 한국인이다. 그래서 오히려 친구들이 관심도 가져주고 많이 도와준다. 내 출연작들을 보여주며 더 친해졌다. <써니> 예고편에 빙의 들린 척하는 장면이 나오잖나. 우리 반 어떤 남자애는 그 장면이 마음에 든다며 ‘아이 러브 유’라고 하더라. (웃음) <불신지옥>은 선생님만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애들을 다 부르셔서…. 하필이면 그때 의자 위에 올라가서 고기 씹는 장면이 나왔다. 친구들이 ‘오 마이 갓’ 하며 진짜 네가 맞냐고 하기에 이건 단지 연기일 뿐이라고 말해줬다. (웃음)
-친구들이 부르는 이름이 있나. =토리(Tori). 제시카, 제니퍼 같은 흔한 영어 이름은 싫었다. 찾다보니 토리라는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유학을 떠나기 직전에 <써니>의 시나리오를 받았다고 들었다. =원래 드라마 <나쁜 남자>를 끝내고 바로 유학을 가려고 했는데, 그때 <써니> 시나리오를 봤다. 감독님께서 너무나 같이 하고 싶어 하신다는 말도 들었다. 그 말씀 듣고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다. 일단 시나리오가 너무 좋았고, 나미라는 캐릭터를 통해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놓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마침 운이 따라줬던 것이, 원래 가려던 학교에 못 가게 됐다. 아, 그러면 영화를 하고 떠나자. 학교는 2학기에 가고. 이렇게 마음먹고 <써니>에 출연하게 됐다.
-보통 작품은 직접 선택하나. <헨젤과 그레텔>이나 <불신지옥>을 보면 장르물에도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연락은 엄마에게 오는데 선택은 내가 한다. 그리고 장르물에 관심있는 거 맞다. 원래 대중적인 영화보다는 나름 색깔이 있고 독특한 느낌의 영화들을 좋아해서 앞으로도 장르적인 느낌이 나는 영화에 많이 출연하고 싶다.
-80년대 고등학생을 연기한다. 비슷한 나이 또래지만, 시대적 차이를 느끼진 않았나. =평소에 엄마랑 옛날이야기를 많이 해서 낯설지 않았다. 예전엔 무슨 음악이 있었고, 옷은 어떻게 입었고, 이런 얘기들. 그리고 내 생각엔 80년대 10대나 요즘 10대나 문화만 다를 뿐이지 순수하고 철없는 건 똑같은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영화를 할 때는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감독님께 말씀드렸더니, “영화 들어가기도 전에 벌써 캐릭터를 파악했구나” 하고 칭찬해주셨다.
-그래도 <써니>의 나미는 다른 여고생들보다 더 어리게 느껴진다. =맞다. 나미는 다른 멤버들보다 더 아기 같은 느낌의 캐릭터다. 감독님은 순정만화에서 톡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를 원하셨다. 눈망울 커서, 무서워하는 표정 짓는 애. (웃음) 그런데 내 성격이 그러지 못해서 힘든 점이 있었다. 내가 평소에 ‘어머’ 이런 말도 못하고, 좀 남자 같다. 목소리도 얇게 낸다고 낸 건데 원래 중저음이라…. 감독님이 내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우리 잠깐 보이시함을 없애버리자. 잠깐 나쁜 남자는 잊자”고 말씀하셨다. (웃음)
-영화에서 빙의 연기, 막춤, 사투리욕을 선보이는데, 이건 여배우들이 꺼리는 ‘3종 세트’ 아닌가. =예쁘게 보이는 건 신경쓰지 않는다. 작품이 정말 좋고, 많이 배울 수 있고, 하고 싶은 캐릭터라면 언제나 주저없이 선택하는 편이다. 언젠가 사이코패스 역을 맡아보는 게 소원이다.
-배우 이한위에게 전라도 사투리를 배웠다고. =선생님과 <로맨틱 헤븐>에 함께 출연한 것이 인연이 됐다. 전라도 사투리를 가르쳐달라고 부탁을 드렸더니 흔쾌히 가르쳐주셨다. 정말 체계적으로 배웠다. 강조해서 읽어야 할 대사는 동그라미 쳐주시고, 전라도 사람들은 평소에 턱을 조금 들고 말한다는 점도 가르쳐주셨다.
-빙의 장면은 어떻게 준비했나. =처음에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마냥 소리만 지른다고 재밌게 나올 장면이 아닌 것 같았다. 랩하는 것처럼 해봤는데 그것도 재미가 없었다. 고민하다가 신들린 아이를 연기했던 <불신지옥>을 떠올렸다. 리허설 때 <불신지옥>의 소진처럼 경련 떨며, 목소리도 바꿔가며 연기했더니 감독님이 이걸로 가자고 하시더라. (웃음)
-<써니>를 준비하며 참고한 영화나 연기가 있다면. =영화 <뽀네뜨>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빅토리아 티비솔이 어린 나이임에도(당시 그녀는 네살이었다-편집자) 아이가 느끼는 감정들을 무척 자연스럽게 표현해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것이 <써니>에서의 내 목표였다.
-현장에서 다른 배우들이 ‘심 선생님’이라 불렀다던데. (웃음) =내가 언니들보다 연기 경력이 조금 많다는 이유로 “아이고, 심 선생님. 식사 하셨습니까. 연기 좀 알려주시죠” 하며 언니들이 장난쳤다. 아직 잘하지도 못하는데 그러니까 쑥스러웠다. 현장에서 일상 자체가 에피소드였다. ‘쌍커풀’ 장미 역의 민영이 언니랑 ‘욕쟁이’ 진희 역의 진주 언니가 콤비다. 당시 유행하던 걸그룹 춤은 두 언니가 현장에서 다 췄던 것 같다.
-누구랑 가장 친했나. =누구 할 것 없이 정말 일곱명 모두 똑같이 친했다. <써니> 멤버 그 자체였달까. 나는 막내라서 예쁨을 많이 받았다. 어제도 춘화 역의 소라 언니를 만났는데 볼 때마다 자꾸 내 엉덩이를 두들긴다. 아이고 그랬어요, 하면서. (웃음)
-다른 멤버 역할이 탐나지는 않았나. =탐났던 캐릭터가 하나 있다. ‘써니’의 최대 적수인, 본드 하는 상미 역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감독님에게 “상미 역할 제가 하면 안될까요” 하고 물어본 적도 있다. 그 역할을 맡은 우희 언니가 워낙 연기를 잘해서 내가 했다면 그만한 포스가 안 나왔을 거다. 평소에 언니랑 굉장히 친한데, 문제의 후반부 장면을 찍을 때만큼은 언니의 감정을 위해 되도록 말을 아꼈던 것 같다. 촬영을 마치고는 서로 수고했다고 격려했다.
-실제로 학교에서는 어떤 학생인가. <써니>의 멤버에 비유한다면. =아무래도 나미에 가장 가깝지 않나 싶다. 스스로는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라고 생각하는데, 친구들이 가끔 ‘4차원’이라고 부르더라. 춘화같이 털털한 면도 있지만 리더는 하고 싶어도 늘 안되더라고. (웃음)
-성인 나미 역을 맡은 유호정과는 어떤 얘기를 나눴나. =촬영 들어가기 전에 선배님께서 “너무 잘하지 마, 얘” 이러시던데. (웃음)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잘하려고 하지 말라고 조언해주셨다. 선배님과 마주치는 장면이 딱 하나 있는데, 그 장면을 찍으며 선배님이 안아주니까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영화 볼 때도 절대 안 우는 편인데.
-장미 오빠 친구를 짝사랑하는 역할인데, 실제로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나. =아직까지 사랑에 관심이 없다. 우리 엄마의 바람이 제발 내가 누군가를 좀 좋아하는 거다. (웃음) 다른 관심사가 너무 많아서 그런가.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하고, 음악도 좋아한다. 하나에 빠지면 헤어나오질 못하는 편이다.
-록음악을 굉장히 좋아한다던데. =그렇다. 록이라는 장르 안에서 굉장히 다양하게 실험할 수 있다는 점에 끌렸다. 비틀스의 광팬이다. 미국 가서 LP판도 몇장 샀다. (눈을 반짝이며) 음악 얘기 더 해도 되나? 핑크 플로이드도 좋아하고, 사이키델릭한 음악도 좋아한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서태지씨와 CF를 찍게 됐을 때는 나의 영웅을 만났다는 생각에 방방 뛸 정도였다. 유학간 학교에 록밴드가 있으면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오케스트라만 있더라. 미국 애들은 록음악 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밴드를 만들면 어떤 파트를 맡고 싶나. =세컨드 기타. 드럼도 실력이 되면 해보고 싶다. 이미 ‘레드 엔젤’이라고 밴드명도 지어놨다. (웃음)
-<써니>는 은경양의 어머니가 매니저로 참여하지 않은 첫 작품이다. =감독님께서 촬영 들어가기 전에 이 영화를 통해 아역배우 심은경이 아닌 배우 심은경이 될 수 있다, 내가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연기가 막힐 때마다 늘 하던 대로 엄마에게 몰래몰래 물어봤다. 그랬더니 엄마가 딱 잘라 말씀하시더라. 이건 너와 감독님이 상의할 문제지 내가 끼어드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더이상 엄마에게 물어보지 말라고. 그 뒤로 감독님과 대화를 더 많이 하게 되면서 점점 엄마에게 물어보는 횟수가 줄어들게 됐다. 그런 면에서 <써니>는 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 작품이다. 감독님은 나를 아역이 아닌 배우 심은경으로 인정해준 첫 감독님이시고. 평생의 은인이 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가 최종목표인지는 미지수다. 지금의 장래희망은 감독이라고 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감독이 꿈이었다. 그때는 그저 현장에서 ‘레디, 액션’ 외치는 게 멋져 보여서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막연함이었는데 그 꿈이 자라면서도 사라지지 않더라. 이제는 나만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고, 그 이야기로 관객과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미 단편 시나리오를 하나 완성했다. 장진 감독님께 보여드렸더니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를 모티브로 했냐며 앞으로 더 많이 써보라고 격려해주시더라. 쑥스러운 동시에 뿌듯했다.
-그럼 나중에 연출작에 배우로 출연해도 되겠다. =(단호하게) 아니. 배우로 출연 안 할 거다. 액션 외치다가 연기하고, 컷하는 건 너무 정신없을 것 같다. 일반인을 캐스팅하고 싶다. 기존 연기에서 예측 불가능한 어떤 것들이 나올 것 같다. 일단 학교를 열심히 다녀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