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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부작 `스페셜` 드라마 <피아노>
2002-01-10

시궁창에서 부르는 천상의 노래

SBS 수·목 9시50분

<피아노>는 목적의식적인 드라마이다. 그 목적은 ‘한 아비의 지독한 사랑’이라는 피아노 앞에 붙는 ‘주제적’ 목적이 아니다. 다음의 목적의식과 비슷하다. “실연한 남자들은 소주병을 병째로 들이켠다. <내 마음을 뺏어봐>는 한 남자가 실연을 해소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었다.” 그 해소 방법은 실연남이 놀이기구를 타면서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오종록 PD가 <피아노>를 시작할 때 목적은 두 가지였다. 비교적 단순한 목적 한 가지는 ‘단순한 표절 판정’에 대한 반항. 오종록 PD의 전작 <해피 투게더>는 원수 같은 형제가 만나서 화해를 이룬다는 이야기다. 태풍(이병헌)의 아버지는 깡패였고, 세명의 아이(조민수, 강성연, 송승헌)의 어머니는 피아노 원장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하고 딸(전지현)을 낳는다. 교통사고로 부부가 죽자 어머니의 아이들은 외할머니 집에 맡겨지고 나머지 둘은 고아원으로 간다. 짜잔, 세월은 흘러 아이들은 모두 장성했다. 그렇다. <해피 투게더>의 전사가 바로 <피아노>인 것이다(본론과 관계없는 팁 하나: 김하늘이 분한 역의 이름 역시 둘 다 수아다).

<해피 투게더>는 방영도 전에 표절논란에 휘말렸다. 일본의 인기 드라마 <한 지붕 아래로>와 설정이 똑같다는 것이 이유였다. 표절논란에서 조목조목 드는 건더기에 대해 대차대조표를 마련하고, 비교시사회를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논란은 지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목적의식의 첫 번째는 그럭저럭 무난하게 달성한 것 같다. <피아노>와 <해피 투게더>는 설정이 똑같은데 표절이냐는 질문의 답이 분명 ‘노’이기 때문이다.

‘가슴이 시리가’ 눈물이 쏟아지는

그렇다면 좀 복잡한 목적은? ‘판타지’다. <피아노>는 1∼4부까지는 특이한 구성방식을 취했다. ‘네이트’ 광고처럼 화면이 깨지는 것과 함께 장마비가 내리고 1부에선 재수(고수)가, 2부에선 경호(조인성)가, 3부에선 수아(김하늘)가 절규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4부에서는 이들 상황이 합쳐진다. 그리고 이게 어찌된 연유인지에 대한 본론은 8부 가서야 밝혀진다. 드라마를 시작하며 홍보용으로 내세운 ‘판타지’ 기법이라는 말에 귀를 쫑긋했던 사람들은 이런 시공간을 뛰어넘는 실험이 ‘판타지’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다. 하지만 그건 오종록 PD의 말로는 “사기”다. 아역 배우가 출연하면서 까먹을 기대감을 이렇게 배치함으로써 부풀리는 것이다. 조금 있다가 당신들이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니 다음회에는 꼭 봐줘야 해, 찡긋!

힘에 부칠까 봐 이런 전략을 썼는데, 아버지 한억관(조재현)은 기대 이상의 선전을 하고 아니,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기를 펼쳐보이고 말았다. 그뒤로도 한억관만 나오면 ‘가슴이 시리가’ 눈물이 쏟아져나와버리는 자동 누수현상을 초래한 것이다. b419go는 sbs <피아노> 게시판에 자신을 바보로 만든 그를 원망하기에 이른다. “티비를 바보상자라고 하는데…. 재현 아저씨는 순식간에 나를 바보로 만들어버린다.”

다시 본론, 13부 판타지 기법은 시작된다. 은심(이보희)의 등장과 함께다. 그 전의 갑작스런 한곳으로의 쏠림, 피아노를 사려고 하니 팔렸고, 집을 사려고 하니 안 팔리던 집이 계약이 끝나버리고, 일편단심 억관이에게 (빵을 왕창 사간다는 이유로, 그리고 교회에 나온다는 이유로) 인순(양금석)이 선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 모든 사건이 흘러들어가는 곳이 은심이다. 은심은 나올 때는 화면이 뽀사시해지며, 음악이 물컹해지고, 연기 대본의 사투리를 무시하고 서울말을 쓴다. 대청이 소리의 끝음을 요란스럽게 흔들며 할머니가 수아의 전화를 받는 장면으로 은심의 집, 그러니까 전(前) 은파 피아노 학원의 내부 전경이 공개되는데, 그곳에는 장년들은 안 보이고 아이와 할머니만이 즐비하다. 할머니는 죽음을 상징하는 대사를 읊는다. 할머니는 은심에게 귀에 꽂고 있던 꽃을 달아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집에 모여사는 사람들은 밥을 안 먹는다. 빵만 먹고 산다.

아사다 지로의 판타지. 눈에 헛게 보이는 환상이 아니라, 헛게 보이는데 그것이 현실에서 맥락이 닿는 판타지. 그들이 사는 곳은 저승이지만 그들의 삶의 모습은 그대로 현실이고 현실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또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는 판타지다.

오종록 PD가 판타지에 마음을 쓰게 된 이유는 혁신적인 선언으로 들린다. “드라마는 리얼리즘과 휴머니즘의 잣대로만 비평된다. 처음부터 작가나 연출자의 가슴을 판단한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는 갑자기 짠해지니 구세군 냄비에 만원을 넣는 3류 휴머니즘밖에 안 나온다. 불륜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미봉으로만 그치는 절대로 현실과는 다른 리얼리즘밖에 안 나온다.”

하이퍼리얼리즘은 판타지로 통한다

오 PD가 전하는 아사다 지로 판타지의 또 하나의 중요한 속성은 “슈퍼 슈퍼 리얼리즘”이다. 판타지 구현 전의 삶이 차마 눈으로 보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해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더 맞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같은 조직 사람한테 “운도 나쁘고 머리까지 나쁜 놈 아이가”라는 소리를 들으며 맞고 그걸 옆집 아줌마 동네 아줌마들이 다 구경하러 나오고 거기에 섞여서 아들 재수가 지켜보고 나중에 아들이 될 경호가 “아들은 거지새끼, 아부지는 깡패새끼”라고 까는 실지로 방영된 장면에서 더 나아가야 했다는 것이다. 시궁창이 없어서 화면에 냄새나도록 시궁창에 머리를 처박히고 자근자근 밟히지 못해서 아쉬웠단다. 판타지를 구현하기 위해서 한억관의 삶은 날로 비참해진다. 새로 얻은 아들은 아버지를 벌레 보듯하고, 행복한 가정을 갖나 싶었는데 사랑하는 여자마저 떠나보내야 하고, 다른 아들은 누나와의 사랑이 아버지 엄마보다 먼저였다고 말해 아버지 속을 시리게 한다.

김규완 작가의 표현대로 “마이너 근성으로 쓰는 메이저 드라마”였기에 시청자에게 이렇게 호응을 받을지는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어쨌든 PD의 처음 목적을 시도하기에는 좋은 상황이 되었다. 소원에 가까운 목적 판타지를 구현하는 일은 기지개 한번 켜고 착수하는 것마냥 되었다.

그 목적으로 가는 길, ‘슈퍼 슈퍼 리얼리즘’이 처량한 신파인 ‘판타지’와 닮았다는 것과 물고 물리는 거대한 악순환의 고리가 살인과 폭력조직을 끌어들였음에도 딱 맞아떨어지는 개운한 점이 없다는 것은 맹점이다. 실연한 사람이 병나발을 부는 일이야 없었지만 관습적인 표현 역시 눈에 띈다. 고통에 휩싸이기만 하면 고함을 지르고(고성방가로 잡혀가기까지 한다), 주요 배경인 병원을 활용할 의도에선지 사람이 시시때때로 쓰러지고, 적당한 장소에서 항상 엿듣는다. 아침 출근길이 어두워지고, 이야기하다 보면 어둑해지고, 입과 소리가 맞지 않는 장면들은 1∼4부에서 두드러졌던 완성도가 아쉬운 대목이다. 구둘래 kuskus@dreamx.net▶ 16부작 `스페셜` 드라마 <피아노>

▶ TV 속의 조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