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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초 만화의 어떤 경향 1
2002-01-10

소년, 소녀들아, 제발 싸워줘

오랫동안 세기말의 대재앙에 대해 이야기해온 만화가들은, 역설적이게도 그 세기말을 가볍게 통과한 직후 가장 큰 시련을 맞고 있는 듯하다. ‘만화가들의 생존 가능성’ 논란에까지 이른 국내 만화산업의 위기는 어찌 보면 전세계적인 만화산업의 위축과도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90년대 중후반 급격한 쇠퇴를 맞이한 미국 만화계는 구닥다리 슈퍼 영웅들을 SF영화계에 팔아먹는 것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1996년 이후 만화산업의 양적인 위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일본의 출판계는 애니메이션, 게임 등 파생상품 구조를 적절히 활용하는 데 만족하고 있다. 대여점 중심의 만화 종수 늘리기에 급급해 질적인 도약을 이루어내지 못한 국내 만화계는, 적정한 수준의 일본만화의 공급이 끊어지자 PC방과 영화관으로 향하는 만화 독자들의 발길을 붙잡아둘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누적된 구조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나는 ‘궁극적으로 작품이 돌파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30년대 대공황 속에서 미국만화가 황금기를 이루고, 패전의 잿더미 속에서 현대 일본만화가 탄생한 것은 ‘훌륭한 창작 환경’이 뒷받침돼서만은 아니었다.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눈부신 작품을 만들어낸 만화가들의 열정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한 사람의 비평적 독자로서, 나는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만화들 속에서 오늘의 만화가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 말해보고자 한다. 먼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우리 만화 독자들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 일본만화의 중요한 경향을 짚어보고, 이후에 한국만화의 다양한 경향들을 차례차례 살펴보자.

일본만화의 시대별 경향

지난해 동안 만화 독자들의 입에 가장 많이 언급된 작품은 (우라사와 나오키), <철완 소녀>(다카하시 쓰토무), <최종병기 그녀>(다카하시 신), 이 세 작품이라 생각한다. 그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열정의 소년, 소녀들이 거대하고 가혹한 세계와 싸워나가는 이야기다. 무척이나 낯익은 테마, 그러나 사실 그것은 지난 20여년간 일본 만화계에 흐르고 있던 경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명백히 시대착오의 산물이다.

70년대의 격렬한 싸움에 지쳤던 일본만화는 80년대 직장인, 요리만화로 끊임없이 다양해졌고, 90년대의 홈드라마, 무책임 개그만화로 끊임없이 비겁해졌다. 물론 <드래곤볼> <슬램덩크> <소년탐정 김전일>이라는 시대의 히트작들 속에서 소년들은 여전히 열심히 싸운다. 하지만 <드래곤볼>은 뻔히 예상되는 결과 속에서 안이하게 아이템을 찾는 ‘게임’이고, <슬램덩크>는 목숨을 걸기보다는 경기 자체를 즐기는 ‘스포츠’이고, <소년탐정 김전일>은 독자들을 조롱하기 위해 조작된 살인극의 ‘퀴즈 풀이’일 뿐이다. 분명히 만화는 현대성을 얻어왔고, 전체보다는 개인을 소중히 하는 민주주의도 승리해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원피스> <헌터헌터> <풀어헤드 코코> <나루토> 등 포스트 드래곤볼 시대의 용사들이 최고의 인기를 얻기 위해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싸우고 있다. 하지만 만화에 대한 끝없는 몰입,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열렬함은 소실되었다. 소실되어도 상관없다. 만화가 그만큼의 풍성한 영역에서 알뜰한 사랑을 받아내면 되니까.

하지만 지난날 열정의 시대를 겪고, 또 열정의 만화를 보고 자란 어떤 만화가들에게 지금의 안이한 만화들은 왠지 견디기 어려운 듯하다. 그래서 우라사와 나오키는 5권에서 유키지 아줌마의 입을 빌려 말한다. “제가 보고 싶은 것은 겉모양뿐인 연애가 아니라, 황당무계하더라도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사나이들의 드라마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목숨을 걸고 지구를 지키듯, 목숨을 걸고 만화를 사랑해야 했던 시대’에 대한 향수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소년들보다는 그 시대를 함께 경험한 30대들에게 외치는 호소문인지도 모른다. 의 이름으로 싸우는 것은 백발을 날리는 아저씨, 아줌마들이고, <철완 소녀>는 아예 패전 직후의 일본으로 돌아간다.

단순히 복고적인 취향으로 치부해버려도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정반대에서 솟아나는 어떤 흐름과 모종의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현실의 뒤안길에서 쓸쓸하게, 그러나 나름의 정도를 지켜가며 살아가던 <시마과장>은 <정치 9단>으로 새로운 대의를 실천하기 위해 나섰는가? <전쟁론>을 통해 현대 일본인의 안이함을 질타하는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목소리가 왜 설득력을 가지는가? <철완 소녀>는 왜 미국이 선물한 야구공을 들고 노골적으로 미국인들과 싸우는가? 의 ‘친구’가 미국에 대한 은유라고 읽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고, 이러한 정치적 해석이 우리 애국 독자들에게 어떤 선입관을 가지게 하는지는 명약관화하지만, 그래도 이들 만화 속에 흐르는 공감대는 외면할 수 없다. 그들은 냉소적인 일본인들 속에서 소실된 감정과 감동을 갈구한다. 아마도 소녀만화의 로맨스와 생체병기 SF를 낯설고도 절묘하게 결합한 <최종병기 그녀>야말로 그러한 감정 회복의 최전선에 서 있는 작품일 것이다. 그이와의 달콤한 로맨스냐, 나를 바라보는 병사들을 위한 싸움이냐? 그녀야말로 비극없는 시대의 위태롭고 비극적인 표상이다. 이명석/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