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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너무 뜨겁지 아니한가

<도가니>의 영화적 태도를 생각하다

<도가니>가 불러일으킨 사회적 파장과 달리 이 작품에 대한 비평적 접근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듯하다. 물론 이 작품에 대한 비평 자체가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그 대부분이 <도가니>가 한국사회에 불러일으킨 파장에 방점을 두면서 작품의 성격을 환원적으로 해석하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현상과 무관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는 영화의 몇몇 특징이 침묵의 영역에 가라앉아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 나는 <도가니>가 일으킨 사회적 영향으로 환원하지 않고, 이 작품을 보며 느꼈던 영화의 몇몇 특징에 대해 글을 써보고 싶었다.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

최근 한국영화의 경향 중 하나는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가는 인물들의 처참함을 전시하는 것이었다. 이들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파토스는 인물이 무언가를 성취하는 순간이 아닌 몰락과 죽음의 길 위에서 허망한 파국을 맞이하는 순간에 발생하곤 했다. <도가니>는 이들 영화와 달리 체념과 무기력의 정서에 함몰되지 않고 그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어쩌면 먹고사는 문제에 치이며 살아가는 강인호(공유)만큼 무기력한 응시를 합리화할 수 있는 인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생존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먹고살기 위해 불의와 타협하는 것은 우리가 가장 흔히 경험하는 현실적인 유혹이자 핑곗거리다. <도가니>는 이러한 유혹을 떨치고 사회적 정의를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강인호를 통해 우리의 삶이 지향해야 하는 가치를 보여준다(원작과 비교할 때 영화에서 강인호의 이러한 성격이 훨씬 강화되어 있다). 어쩌면 (이후 지적할 단점에도 불구하고) <도가니>의 가장 중요한 미덕은 그 누구도 쉽게 예상하지 못했던 사회적 영향력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영화적 태도에 있을 것이다.

<도가니>는 이러한 삶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고통으로 일그러진 인물의 얼굴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도가니>는 여느 영화와 비교해도 클로즈업의 활용이 두드러지는 단순 명료한 연출 스타일을 지향한다. 무엇보다 명확한 소리를 들려주지 못하는 소년, 소녀의 얼굴은 고통 그 자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도가니>는 얼굴의 힘과 그 호소력을 믿으며, 이를 바탕으로 관객에게 ‘고통받는 얼굴’에 대한 윤리적 반응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박탈당한 채 고통으로 일그러진 타인의 얼굴에 직면하는 것, 그것이 <도가니>가 관객에게 윤리적 반응을 요구하는 방식이다. 어쩌면 우리의 삶에 윤리적 전망이 펼쳐질 수 있다면 그것은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 보며 그 신음에 귀기울이는 것, 자신이 타인의 고통에 노출된 인질임을 수용하는 것, 그럼으로써 타인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말마따나 ‘윤리란 보는 것’이고, 또한 ‘봄인 동시에 정의를 실천하는 것’일 수 있다. <도가니>로부터 비롯된 사회적 현상 모두가 이러한 윤리적 차원에서 행해진 것으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렇기에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소년, 소녀와 마주하며 스스로 타인의 인질이 되는 강인호와 서유진(정유미)의 태도만큼은 (레비나스의 관점에 보자면) 그 어떤 영화의 인물보다 윤리적이다. 그들은 봄으로써 진정으로 윤리적 주체가 된다.

판단의 틈이 없는 분노의 도가니

<도가니>는 소년, 소녀의 얼굴을 중심으로 한 진술(인터뷰나 법정) 장면의 연출과 비교할 때, 악몽 같은 과거 사건의 재연이나 악마 같은 선생들의 묘사 방식은 다소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이들 장면은 장르적인 색채가 두드러지는데, 특히 공포영화나 스릴러영화의 관습을 차용하며 필요 이상으로 과잉된 연출을 보여준다. 소년, 소녀의 진술을 시각적으로 재연하는 장면의 경우, 말하는 자(또는 듣는 자)의 심리적 충격이 덧붙여진 결과라고도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 이들 장면은 그저 추악하기 그지없는 선생들을 악마로 그려내기 위한, 그러니까 영화 속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단순하게 그려내기 위한 극적 장치처럼 느껴졌다. 대표적인 장면이 교장의 입양 딸이자 사관 선생인 윤자애(김주령)를 관객에게 처음으로 소개하는 장면이다. 그녀의 얼굴이 화면을 채울 때 그것은 마치 공포영화의 미치광이 살인마나 사이코패스를 소개하는 연출 방식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 화면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그 누구의 시점숏도 아닌데, 그렇다면 이 숏은 순전히 윤자애를 특정한 성격의 인물로 규정하고 그녀에 대한 관객의 감정적 반응을 단숨에 결정짓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 숏에서 규정된 인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교장과 그의 쌍둥이 동생(장광), 그리고 박보현(김민상) 역시도 마찬가지다. <도가니>는 이들을 인간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악마의 형상으로 그려냄으로써 관객이 마음껏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대상으로 자리하도록 한다.

어쩌면 이러한 이질적이고 과잉의 표현 방식은 관객의 분노를 고조시켜야 한다는 강박의 과잉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실제로 <도가니>는 그 제목만큼이나 사태의 종합적인 판단보다는 즉각적인 분노로 끓어오르는 도가니 같은 감정의 영화다. <도가니>는 관객의 분노가 사그라질 틈을 주지 않는다. 물론 흥행 결과나 사회적 결과로 봤을 때 이러한 단선적인 표현이 성공적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관객의 일방적 분노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적이었다는 사실과 이러한 표현 방식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일 것이다. 흥행 결과가 작품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 시대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처럼 분노 이외의 다른 판단의 틈을 주지 않는 묘사 방식을 옳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들이 비록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이라 하더라도 환상의 세계에 사는 괴물이 아닌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또 다른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들에게 인간의 형상을 지워버리는 것은 그들에 대한 경험을 현실이 아닌 영화적인 것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아니었을까? 오히려 <도가니>에 현실의 질감을 주는 것은 악마 같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에게 기생하며 연명하는 일련의 인물들이다. 교육청 직원의 말 한마디가 자애학교 선생들의 파렴치한 행위보다 더 처참하고 절망적인 기분을 안겨준 것은 나만의 경험이 아니지 않았을까?

<도가니>에서 관객의 분노를 이끌어내는 관습적인 장면 중 하나는 전민수(백승환)가 법정에서 합의로 풀려난 박보현을 찾아가는 장면이다(이 장면 역시 공지영의 원작에 없던 설정이 각색 과정에 삽입된 것이다). 사적 복수를 금지하기 위한 법정의 심판에서 배신당한 전민수가 박보현에게 사적 복수를 감행한다는 설정은 영화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정말 이 장면이 <도가니>에 필요했을까? 법정의 판결이 내려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분노할 수밖에 없는 암담한 세계를 충분히 경험했는데, 거기에 전민수의 죽음을 더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진실의 두려움을 회피하는 데 익숙한 절망적 세계에서 전민수의 자살 행위가 관객의 분노(또는 감정적 파토스)를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판단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의 죽음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가 살아서 행위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고 오히려 그 편이 <도가니>에는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전민수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그 위에 얹는 것은 극적 필연이 아니라 비극의 강박처럼 보일 뿐이다. 분노의 감정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 진실에 귀 멀고 입 닫은 이 시대의 정의를 자극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판단한 것일까? <도가니>는 분명 분노로 뜨거워진 도가니 같은 영화일 필요가 있었지만, 그것을 뜨겁게 달궈야 했던 황동혁 감독만큼은 조금 더 냉정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마치 ‘얼음의 도가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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