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의 역할은 좋은 영화의 가치를 먼저 알아보고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움직이는 것이다. 이 역할은 여전히 절실하다. 평론에 따라 움직이는 관객은 얼마되지 않는다. 도쿄라면 한 3천명 될까. 이건 평론이 자국 내만으로 한정할 때 역시 별다른 힘이 없다는 걸 뜻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평론이라면 그것을 외국어로 옮기는 일이 중요한 때가 됐다고 본다.”
하스미와의 인터뷰는 2월8일 오전 도쿄대 총장 집무실에서 이루어졌다. 지난 1월 그의 대표적인 저서 가운데 하나인 <감독 오즈 야스지로>(한나래 펴냄) 번역 출간과 서울시네마테크의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을 계기로 인터뷰를 요청했고, 그는 흔쾌히 응했다. 도쿄대 총장 노릇을 하느라 영화에 소홀했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쉬리> <거짓말>에 대한 논평을 잊지 않았으며, 퇴임 이후엔 존 포드론을 쓰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당신은 1960년대 프랑스에서 불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엘리트 지식인이다. 당시의 일본 지식인사회는 영화를 진지한 예술로 받아들이기 전일 텐데, 어떤 계기로 영화평론에 뛰어들었나.
내가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1962년부터 1965년까지는 프랑스 누벨바그가 만개한 시기였다. 고다르, 트뤼포, 로메르 같은 사람이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나는 파리의 극장과 시네마테크를 오가며 새로운 물결을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이 위대한 작가라고 해서 본 건 물론 아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작품의 질을 가리지 않고 보는 편이었다. 미국영화, 특히 액션영화도 좋아한다. 바로 이런 점이 보통의 지식인들이 영화에 접근하는 것과 다른 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지식을 쌓은 연후에 뒤늦게 영화에 입문하는 사람들의 경우 일종의 ‘명작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거의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았고 이것이 나중에 영화글 쓰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도 그때 발견했다. 나는 그때 오즈를 대가라고 생각하면서 본 것이 아니라 일본의 촬영소의 감독 중 하나로 생각하면서 보았다. 아무튼 프랑스 유학 시절은 영화가 가장 동시대적인 예술이며 문화라는 점을 알게 해주었고, 그러다보니 영화에 대한 글을 쓰게 됐다.
■동료 학자들의 눈총이 따가왔을 것 같다.
내가 1973년 도쿄대에서 영화학 강좌를 만들었을 때, 주변에서 말이 많았다고 들었다. 본래 저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니까, 저런 짓을 한다고들 생각했던 것 같다. (웃음)
■영화평론뿐만 아니라, 영화상영활동 이를테면 시네마테크 운동도 활발하게 벌였는데, 그 역시 이례적이다.
1970년대엔 그게 절실했다. 당시엔 비디오가 없어, 훌륭한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선 극장에서 필름으로 볼 수밖에 없었으니까. 처음에는 아테네 프랑세 문화센터에서 대니얼 슈미트, 빔 벤더스 같은 감독을 소개했다. 80년대 이후엔 현대 작가들뿐만 아니라, 러시아 렌 스튜디오 영화 같은 일본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영화도 소개했다. 상영회를 열면, 도쿄 시네클럽의 청년들이 몰려왔는데, 그들을 보면 의욕이 솟았다. 이들은 영화에 대한 해석 이전에 새로운 영화 자체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했다. 상영회에 몰려오는 젊은이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게 내가 상영활동을 벌이게 된 원동력이었다.
■일본의 기성 평단으로부터도 일정한 거리를 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 평단의 큰 문제는 새로 등장한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생전의 미조구치 겐지만 해도 그렇다. 동시대 평론가들보다는 외국에서 더 높이 평가됐다. 오즈 야스지로도 그렇고. 현재 일본의 영화평론가들은 그 부정적 유산을 반복하고 있다. 기타노 다케시도 그렇지 않은가.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진지한 주목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경향이 못마땅하다. 상을 받기 이전부터 나는 기타노 다케시 영화의 가치를 알리려고 노력했고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1996년 도쿄에서 그의 영화에 대한 국제심포지엄을 열기도 했다. 이런 활동에서 평론가 친구 하나가 큰힘이 됐다. 야마네 사다오라는 사람이다. 그 친구하고 같이 상영활동할 땐 혼자할 때보다 내겐 두배, 세배 힘이 난다.
■현재 영화계에서 맹활약을 벌이고 있는 구로사와 기요시, 수오 마사유키, 아오야마 신지가 학생 시절에 당신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들었다.
난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구로사와나 수오, 아오야마가 감성이 제일 예민할 때 나는 그들을 만났다. 강의할 때 그 친구들한테 이렇게 말했다. 내 강의를 듣고 당신이 선택할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영화에 대해 쓰는 것, 둘은 영화를 만드는 것. 내가 보기에 이들은 평론가로서도 굉장히 뛰어난 인물들이었고, 평론가의 길을 염두에 두고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영화를 만들라고 권했다. 그 길이 더 가치있는 길이니까. 운이 좋았다는 게 여기도 적용된다. 당시엔 쇼치쿠, 닛카쓰 등 일본의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거의 괴멸하는 수준이라 할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더이상 도제 시스템도 지켜지지 않았고. 젊은 감독 지망생들에게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프랑스 누벨바그와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초기에 당신의 영향이 깊게 밴 영화들을 만들었다. 이를테면 초기의 영화광적인 영화, 영화사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갖가지 인용으로 가득한 영화 말이다. 90년대엔 거기서 벗어나 각자 자기 길을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처음엔 그랬다고 해도 고다르나 트뤼포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의 길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선생으로서 내가 한 일은 최초의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고, 나는 그것만으로도 기쁘다.
■당신의 저서 <감독 오즈 야스지로>가 최근 한국에 번역 출간됐다. 이 책에서 당신은 오즈의 영화를 일본적, 동양적 영화미학의 전범으로 규정하는 데 반대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즈를 아방가르드적 에너지로 충만한 작가로 파악하고 있다. 동양적 미의식이란 손쉬운 전제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허우샤오시엔이나 에드워드 양에게도 오즈적인 요소가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중요한 아시아 감독에게도 오즈적인 것이 발견된다. 그런데 허우샤오시엔은 <비정성시>를 만들 때까지도 오즈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동양적 미의식이란 게 없다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할까.미묘하고 섬세한 문제다. 오즈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커팅의 영화, 편집의 영화다.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는 롱테이크의 영화, 이를테면 바라보는 영화다. 컷 수를 비교하면 오즈가 허우샤오시엔의 3배는 될 것이다. 그 점에선 닮지 않았다. 그러나 공통점은 확실히 있다. 그건 세계에 대한 시선의 문제다. 결론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카메라를 대고 있는 동안 결론이 서서히 도출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방식이 아시아에만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아시아감독들에 확실히 많다는 건 인정한다. 나는 이게 구체성의 길이고, 현재 많은 아시아영화는 구체성의 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포스터모더니즘에서 모더니즘으로 되돌아가는 길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두 한국영화를 예로 들고 싶다. <쉬리>는 굉장히 추상적인 영화다. 내용은 분명 한국사회의 현실적 상황에서 전개되지만 시선은 거의 게임적이라 하고 싶을 정도로 아주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반면 <거짓말>은 구체적이다. 동시대적인 생생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격렬한 사도-마조히즘에도 불구하고 내게 이 영화는 매우 아시아적인 텍스트로 보인다.
■당신은 오랫동안 젊은이의 열정에 고무받고 젊은이들에게서 새로운 재능을 발견해왔다. 그러나 최근의 저서를 보면 젊은이들에게 좀더 진지해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나이든 선생의 훈계로 받아들여지기도 할 것 같다.
난 1990년대 초반부터 일본사회의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를테면 옛날엔 도쿄대를 졸업하면 모든 게 보장됐다. 이제 더이상 그렇지 않다. ‘구질서’가 붕괴되고 ‘신질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변화를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총장이 되어 잘난 척하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웃음)
■미국에서는 물론 프랑스에서도 평론가의 역할에 대한 신뢰가 의심받고 있다. 얼마 전 프랑스에선 영화 개봉 전에는 리뷰를 발표하지 말라는 감독들의 성명서까지 발표됐다. 평론이 여전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나.
평론가의 역할은 좋은 영화의 가치를 먼저 알아보고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움직이는 것이다. 이 역할은 여전히 절실하다. 평론에 따라 움직이는 관객은 얼마되지 않는다. 도쿄라면 한 3천명 될까. 뉴욕도 비슷하다. 파리는 한 7천명 정도인 것 같다. 이건 평론이 자국 내만으로 한정할 때 역시 별다른 힘이 없다는 걸 뜻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평론이라면 그것을 외국어로 옮기는 일이 중요한 때가 됐다고 본다.
■90년대 이후에는 평론가로서의 활동이 좀 뜸한 느낌이다.
93년부터 학교에서 행정적인 자리를 맡다보니(하스미는 총장이 되기 전에는 교양학부장 겸 부총장으로 일했음--편집자주) 그 전만큼 글을 쓰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상영활동과 관련하여 외국어로 상당히 많은 글을 발표했다. 가령 산 세바스찬 영화제에서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을 할 때 영어로 글을 쓰기도 했으며 도쿄에서 장 르누아르 회고전을 할 때는 불어로 글을 쓰기도 했다.
■96년에 로카르노영화제에서 고다르의 <영화사>를 주제로 한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한 적이 있는 걸로 안다. 고다르의 인상은 어땠는가.
고다르는 세번 정도 만난 적이 있는데 뭐라고 할까 상당히 응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96년에는 로카르노에 가기 전에 스위스 고다르의 자택에 가서 <영화사>를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엉뚱하게 도요타 차를 마구 비판하는 것이 아닌가. 도요타와 아무 관계도 없는 나로서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웃음) 황당해했던 적이 있다.
■에드워드 양과 허우샤오시엔과의 교분도 깊다고 들었다.
에드워드 양은 <하나 그리고 둘> 찍을 때, 나더러 일본인 오타 역을 맡으라고 해서 거절한 적 있다. 최근엔 허우샤오시엔이 신작을 일본에서 일부 찍었는데, 온천에서 목욕하는 남자로 나오라고 그래서 그것도 거절했다. (웃음)
■최근에 주목하는 감독이 있다면.
글쎄…. 기억나는 대로 말한다면, 중국의 지아장커가 떠오른다. 이 사람은 중국의 5세대를 능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우예도 뛰어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데뷔작 <주말연인>이 아주 훌륭했다. 제임스 그레이는 데뷔작 <리틀 오데사>를 보고 굉장히 기대했는데, 두 번째 작품이 실망스러웠다. 조금 옛날 감독을 들자면 소마이 신지와 이장호는 내게는 지금도 안타까운 감독들이다. 둘 다 80년대 대단한 작품을 만들었지만 90년대 들어 주춤했고 그 사이에 젊은 세대가 등장하는 바람에 국제적으로 알려질 기회를 잃은 감이 있다. 특히 이장호는 여건만 받쳐준다면 세계적인 작가가 될 수도 있었다고 믿었는데, 아깝다. 그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대단한 작품이다. 확실히 아시아에 많은 재능이 몰려 있다. 유럽에선 뛰어난 감독이 잘 보이지 않는다.
■프랑스의 아르노 데플레생은 어떻게 보는가.
물론 좋은 감독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감독은 70년대 프랑스에 많았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유럽영화는 긴장감이 상실된 탓인지 예전만큼 흥미로운 영화가 나오질 않는다.
■4월이면 총장 임기가 끝나는 걸로 알고 있다. 퇴임 뒤엔 다시 영화일에 나설 것인가.
총장하는 동안 쓰고 싶었는데 하지 못하는 것이 많아 답답했다. 그동안 못 본 작품들부터 봐야겠고, 우선은 미뤄두었던 존 포드론을 쓸 계획이다. 오랜 전부터 완결하려했던 <보바리 부인론>도 마무리지어야겠고.
도쿄 = 임재철/ 영화평론가 marienbad@hanmail.net
허문영 기자 moon8@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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