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프랑수아 오종 l 위반의 섹스, 저항의 에로스 (1)
2002-01-16

도발적인 표현으로 성과 권력 관계 탐사한 프랑스 감독

프랑수아 오종의 52분짜리 중편영화 <바다를 보라>(1997)는 사실 전체적으로는 은근하게 진행되는 호러 혹은 스릴러영화이지만 메스꺼움을 자아내는 몇몇 불편한 장면들을 담고 있기도 한 영화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는 주인공 사샤가 양치질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전에 우린 이미 사샤의 별장을 찾은 방랑자가 사샤의 칫솔을 변을 보고 물을 내리지 않은 변기에 슬쩍 담가놓은 것을 보았기에 그 ‘일상적인’ 장면은 심한 욕지기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텐트 안에서 죽어 있는 사샤의 벌거벗은 몸뚱어리, 특히 흉측하게 꿰매져 있는(루이스 브뉘엘의 영화 <욕망의 모호한 대상>의 포스터에 그려진, 얼기설기 꿰매진 여자 입술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그녀의 음부를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영화의 후반부 장면은 비록 짧지만 너무나 충격적으로 다가오기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몸서리를 치게 만든다.

오종의 영화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런 식의 대담한 장면들과 다분히 선정적인 측면들은 평자들을 그의 옹호자들과 반대자들로 나뉘게 만들었는데, 프랑스의 영화평론가인 프레데릭 보노는 스스로 거침없이 말하길 후자쪽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보노는 앞에서 예로 든 것과 같은 장면이 보는 이들에게 불쾌감을 심어준다고 말한다. 그것은 관객을 일일이 설명해주고 또 보여줘야만 그제야 이해하는 백치 같은 존재로 다루기 때문에 불쾌하다는 것이다(조너선 로젠봄같이 까다로운 취향을 가진 또다른 평론가도 아니나 다를까 <바다를 보라>의 경박함에 질려서 오종의 다음 세편의 장편영화들을 보지 않았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오종에 대한 보노의 평가를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면, <바다를 보라> 이후의 오종을 두고서 보노는 “제 멋에 겨워 으스대며 공허한 도발만을 일삼는 예술가”라며 자족적인 울타리 안에 스스로 처박혀 있는 인물, 그래서 안타깝게도 자신의 재능을 희생해버리는 괴짜 영화감독 정도로 치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노는 한때 자신이 반(反)오종 진영에 속해있다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그런 그의 태도가 호의적인 쪽으로 바뀐 것은 오종이 세 번째 장편 <불타는 바위 위의 물방울>을 내놓을 때였다.

그렇다고 보노가 아직까지 완전히 ‘전향’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오종의 네 번째 장편 (보노의 평가에 따르면 오종의 진정으로 유일한 걸작) <모래 아래에서>가 나오자 보노는 오종에 대한 입장을 완전히 바꿔버린다. 보노의 말을 빌리자면, “그해에 나온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영화”인 <모래 아래에서>는 “프랑스영화계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모델”로까지 평가받게 되고 그것을 만든 오종은 “프랑스영화의 확실한 자산,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작가”(a bankable auteur: 제작비가 충분치 않아 상당 부분을 슈퍼16mm로 찍어야 했던 <모래 아래에서>는 프랑스에서만 60만명의 관객을 끌어들이며 흥행에서도 뜻하지 않게 성공을 거둔 편이었다) 대접을 받게 되었다.

우상파괴적인 프랑스의 신동

지금까지 보노의 평가를 짧지 않은 분량으로 인용한 것은 그것이 오종이라는 한 젊은 영화감독이 현재까지 걸어온 길과 그에 대한 비평적 시선의 변천을 어느 정도 잘 요약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종이 만든 네편의 장편영화들은 도발적인 실패작들인 전작 두 작품들과 좀더 성숙해진 수작들인 그뒤의 두 작품들로 나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이건 오종이 아직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예술적 ‘성장’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미완의 작가, 그러니까 지금보다는 오히려 내일이 더 기대되는, 그야말로 미래의 시네아스트라는 뜻일 것이다.

1967년 파리에서 태어난 오종은 영상매체와 자연스레 가까워질 수 있는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일찍부터 그는 아버지가 비디오로 찍은 다양한 영상들을 봐왔고 10대 후반부터는 슈퍼8mm로 직접 많은 단편영화를 찍어왔던 것이다. 오종은 파리1대학에서 영화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90년에는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학교인 페미스에 들어가 영화연출을 전공하게 된다. 그뒤로도 그는 꾸준히 단편영화들을 만들었는데 그중 다수가 세계 유수의 단편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오종의 단편으로 특히 유명한 것으로 <여름 드레스>(1996)라는 작품은 로카르노영화제에서 ‘내일의 표범’상을 수상했다. 비평적 주목을 끈 중편 <바다를 보라> 이후 오종은 <시트콤>이란 작품을 가지고 장편영화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영화감독으로서 오종은 정규 ‘시스템’ 안에서 수학했던 그의 모나지 않은 경력이나 또는 스탠더드하게 잘생긴 그의 반듯한 용모를 대충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라면 어쩌면 그것들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듯한 느낌마저 안겨줄 수도 있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동시대 프랑스영화계의 악동’이라거나 ‘우상파괴주의적인 프랑스의 신동 영화감독’같이 ‘예술적 악덕으로의 투신’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닉네임이 오종에게 붙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건 아마도 그의 영화 속에서는 섹슈얼리티가, 그것도 사회의 규범을 간단히 무시하는, 그리고 종종 폭력(적 상황)을 수반하기도 하는, 위반의 섹슈얼리티가 마구 분출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나 여자를 유혹하든 또는 한 여자가 다른 남자나 여자를 유혹하든, 오종의 영화에서 성적인 유혹이란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띤 것이든 도처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아주 일반적인 사건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유혹과 그 결과에 대한 다양한 보고서와도 같은 오종의 영화들에서 당사자들은 유혹의 사건과 더불어 성적인 게임 상황에 돌입한다. 그런데 그 게임이란 것은 많은 경우 권력이 개입되는 것이다. 여기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조종하고 이용하면서 그 위에 군림한다. 이들 사이의 관계는 거의 항상 죽음과 얽혀 있는 치명적인 관계이다. 억압당하는 자는 권력을 가진 자로부터 예컨대 차갑게 경멸당하면서 처참하게 살해되기도 하고(<바다를 보라>의 사샤), 살인이라는 엄청난 범죄에 가담할 것을 요구받기도 하며(<범죄자 연인들>의 뤽), 버림받았다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불타는 바위 위의 물방울>의 프란츠).

이런 오종의 세계는 다른 시네아스트들의 그것과 한번 짝지어볼 만한 것이다. 예컨대 오종의 영화는, 불안감이 들게 하는 악취미를 과시한다는 점에서는 존 워터스의 영화를, 도착적이고 복잡한 성적 관계를 가지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직조한다는 점에서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를, 그리고 지극히 회의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루이스 브뉘엘의 영화를 닮아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대로 에로틱한 관계에 스며든 권력의 모티브가 오종 영화의 근간을 관통하는 것이라면 오종은 그 누구보다도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후예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오종은 파스빈더를 따라서 애정이란 억압을 위한 가장 교활한 최선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파스빈더처럼 그런 견해를 거쳐서 정치적·역사적 컨텍스트를 노출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쨌든 오종은 파스빈더와 유사한 견해를 통과하여 인간 존재의 비극과 부조리, 그 잔인함에 닿으려 한다(실제로도 오종은 “나는 항상 파스빈더의 영화들뿐만 아니라 영화감독으로서 그의 삶 또한 숭배한다”고 말하는 파스빈더 추종자인데, 그가 파스빈더에게 바치는 경의는 뒤에 다시 언급할 오종의 영화 <…물방울>을 통해 거의 노골적이라고 할 만한 방식으로 드러나게 된다).▶ 프랑수아 오종 l 위반의 섹스, 저항의 에로스 (1)

▶ 프랑수아 오종 l 위반의 섹스, 저항의 에로스 (2)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