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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지대가 낳은 작가, 존 르 카레
장영엽 2012-02-14

<존 르 카레>

존 르 카레는 현재 영국에서 글을 쓰는 그 어떤 소설가에게도 뒤지지 않는 작가다.” <가디언>의 평처럼 존 르 카레는 스파이 소설 작가로서의 장르적 성취와 보수적인 문학계의 지지를 동시에 이뤄낸 보기 드문 작가다. 그는 냉전시대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던 스파이들의 냉혹한 세계를 사실적인 필치로 그려내며 이언 플레밍이 창조해낸 환상적인 스파이 세계에 머물러 있던 독자들을 현실 세계로 데려왔다.

영미 진영과 소련 진영의 긴장감이 극에 달하던 60, 70년대, 대다수의 영미권 스파이 소설들이 소련이라는 공공의 적과의 대결을 작품의 주요 테마로 삼았다면 존 르 카레는 이데올로기라는 냉전시대의 유산 속에서 무기력함을 느끼는 개인의 초상을 직시한다. 스파이로 분한 개인이 느끼는 윤리적 혼란과 고독감은 르 카레가 창조해낸 캐릭터들의 대사를 통해 종종 드러나는데, 그의 첫 소설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를 인용하면 이렇다. “거짓말하고 속이는 더러운 술수 덕분에 보통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조차 모릅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당신에게 제공하는 연료로, 흔들리는 깃발과 음악 같은 걸 연료로 당신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다른 종류의 연료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외로울 때 말입니다.”(조지 스마일리) 르 카레의 인물들은 맡은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늘 옳고 그름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그들의 직업에 대해 고뇌하는, 회색지대의 사람들이다. 특히 1963년작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는 등장인물들의 이러한 면모를 예리하게 조명한 작품으로, 존 르 카레의 대표작이자 스파이 소설 장르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소설만큼이나 세간의 흥미를 끄는 건 존 르 카레의 개인적인 인생 스토리다. 그는 옥스퍼드대학 시절 MI5를 도와 급진 좌파 학생들 중 스파이를 색출해내는 임무를 맡았다. 그 성과를 인정받아 르 카레는 졸업 뒤 MI5, MI6에서 근무하며 실제로 영국을 위해 스파이 업무를 수행했다. 영국 정보기관의 요원으로 활동했던 르 카레의 경험은 그가 창조해낸 캐릭터에 밀접한 영향을 미쳤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케임브리지 스파이’로 유명한 킴 필비다. 존 르 카레가 MI6를 그만두는 하나의 계기를 제공했던 필비는, 세련된 매너와 수려한 외모,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이란 엘리트 코스를 자랑하는 영국인 중의 영국인이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그가 수많은 영국 요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소비에트 연방의 이중간첩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르 카레로 하여금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스파이’ 캐릭터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했다.

존 르 카레가 창조해낸 최고의 캐릭터는, 당연히 조지 스마일리다. 르 카레의 첫 작품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부터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등의 대표작에 어김없이 등장한 스마일리는 두꺼비처럼 땅딸막하고 눈에 띄지 않는 외모를 지녀 굳이 변장술도 필요없을, 다시 말해 제임스 본드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일련의 소설들을 통해 스마일리가 보여준 신중함과 민첩함, 전혀 관계없는 단서들을 하나로 묶어낼 줄 아는 뛰어난 추론능력은 그를 스파이 소설 역사상 가장 현실적이고 지적인 캐릭터로 평가하게 한다. 그의 역량은 소련 정보부의 수장 카를라와의 대결에서 극대화하는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영예로운 학생> <스마일리의 사람들> 등 일명 ‘카를라 3부작’이라 불리는 세 작품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카를라와 스마일리의 최후의 대결을 그린 <스마일리의 사람들>은 향후 영화로 제작될 가능성이 있다고 게리 올드먼이 밝힌 바 있다.

냉전시대가 끝나고 포스트 9·11 시대에 접어든 지금도 존 르 카레는 <원티드 맨> <미션 송> <영원한 친구> 등의 소설을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시대가 변했고, 내 초점도 변했다”고 말하는 그의 관심사는 이제 미국으로 대변되는 강대국의 패권주의에 머물러 있다. 우정, 충성심과 같은 과거의 고결한 가치들이 휴짓조각처럼 취급되는 지금, 존 르 카레의 소설은 시대가, 개인이 잊지 말아야 할 가치들을 지적하며 여전히 시대의 파수꾼으로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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