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정해야겠다. 한두해 전부터 꾸준히 내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초조함이다. 쫓기고 있다는 이 감각은, 무선 통신망과 스마트폰으로 활성화된 소셜 미디어의 그물에 내 일상이 포섭됐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매일 밤 나는 오늘 보고 들었어야 마땅하나 미처 따라잡지 못한 뉴스와 지식의 양을 가늠하며 삿포로의 눈 치우는 인부처럼 망연자실하다. 때로는 희미한 자책마저 따른다. 어째서 책망까지 하는 걸까? 문제의 정보가 어디 먼 곳이 아닌 지척에 있으며 아무도 그것을 취하라고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좋은 노동자가 못 되어 불안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회를 충분히 누리고 바람직하게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애석해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호강스런 스트레스라고 해도 행복하지 않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자진해서 가입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가 멤버에게 (은연중에) 요구하는 매너는 동시성과 즉각성이다. 뉴스채널 하단에나 흐르는 줄 알았던 속보의 띠가 머릿속에서 24시간 돌아가고, SNS는 나의 궁금증에 신속한 답을 돌려주면서 그러니까 너도 빠른 답을 포스팅하라고 (은연중에) 압박한다. 영화기자를 예로 삼자면 더 많은 영화의 프로덕션 정보, 리뷰, 비디오 클립이 쏟아져 들어오고 덩달아 코멘트해야 할 영화도 정확히 그만큼 늘어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글쓰기란 한 사람이 경영하는 미용실과 비슷해서 일거리가 아무리 많아도 생산량은 엇비슷하고 애석함만 커진다. 거리를 걸어가면서 끊임없이 즉흥연주를 해야 하는 악사(busker)가 된 기분이랄까. 막상 변화한 세상의 주문에는 부응하지 못하면서도 내 신체와 정신은 어느새 네트워크의 메트로놈에 맞게 개조되어 굼뜬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급기야 외부에서 흘러드는 정보와 무관하게 혼자서 하는 생각의 사슬조차 조바심에 뚝뚝 끊긴다. 하물며 사후적인 숙고나 명상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느껴진다.
내가 직접 선택한 개인과 매체들로부터 뉴스와 지식을 배달받을 수 있는 SNS와 그 내용을 잡지처럼 보기 좋게 편집까지 해주는 어플(application)을 처음 접했을 때는 광활한 개가식 도서관이 눈앞에 열린 양 환호했다. 포털의 헤드라인에 휘둘려 웹의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시대에 비하면 얼마나 편리하고 주체적인가! 그러나 기적처럼 손쉽게 기억을 불러내고 체험을 축약해주는 테크놀로지는 대부분의 마술이 그러하듯 속임수를 감추고 있었으니, 현실의 나는 ‘타임라인’이라 불리는- 자율적으로 짰다는 이유로 섣불리 폐기하지도 못하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 못 박혀 어정쩡하게 서 있다. 이런….
1-1. 영화는, 자력(自力)으로 멈추기 힘들게 돼버린 이 컨베이어 벨트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전통적으로 영화 관람은 한시적으로 이성의 스위치를 끄고 스펙터클에 몸을 맡기는 다소 자존심 상하는 행위로 간주되었지만, 산만함이 만연한 세상에서 상황은 역전된다. 어떤 부류의 영화를 보건, 영화관은 적어도 우리의 뇌에서 정보망의 단자를 뽑고 검색과 스캔을 일시중지하도록 강제한다. 그리하여 노이즈로부터 해방시키고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인간 본연의 능력을 회복시킨다. 따지고 보면 새로운 소식은 아니다. 태생부터 영화관은 일상에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세상을 주시하고 숙고하는 장소였다. 대상의 이미지뿐 아니라 그것의 지속(삶)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최초의 예술로서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현실보다 더 리얼하거나 현실과는 다른 방식으로 리얼한 세계를 제시한다고 버지니아 울프가 지적한 것이 1926년이다. 그녀가 쓰기를, “(영화관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포함돼 있지 않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21세기 들어 새로운 소식이 있다면 영화관이 우리가 삶을 주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가 되었다는 점이다. 시네마는, 혼자 있는데도 더 혼자가 되고 싶다는 이상한 희망. 자꾸 나를 다그치고 힐문하는 ‘내’가 사라져주었으면 고맙겠다는 자살적 충동을 에둘러 충족시켜주는 희귀한 공간이 됐다. 영화관은 100년 전처럼 여전히 도피처이지만 반대의 의미에서 그러하다. 지금 빠른 속도로 변화하며 자극을 제공하는 진영은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다. 과거에는 권태를 피해 영화관으로 갔지만 이제는 희귀해진 권태를 찾아, 고독과 대차게 직면하러 거기에 갈 수도 있다는 의미다.
2. 인문사회과학자의 역할은 만인이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현상을 의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언어의 집을 지어주는 데에 있다(고 믿어왔다). 로맨틱하게 말하면 그건 동시대인을 프로페셔널하게 위안하는 그들만의 방식이기도 하다(병명도 모르고 앓는 일만큼 답답한 노릇이 있겠는가?). 철학자 한병철이 쓴 <피로사회>는 앞서 묘사한 궁지를 자기 착취와 과잉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라고 진단한다. 집단적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를 앓듯 우리가 매일 벌이는 강박적인 멀티태스킹을, 먹는 동안에도 먹이에 몰입하지 못하고 주변의 사태를 살펴야 하는 야생동물의 습성에 비한다. 저자는,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생존에 대한 관심에, 변화를 추동할 힘을 가진 깊은 분노는 쓸데없이 휘발하는 가벼운 짜증에 자리를 내주었다고 지적한다.
<피로사회>에 의하면 예술이 당면한 난관은 심심함을 병적으로 백안시하는 과잉주의(過剩注意, hyper-attention) 문화다. 이 책에 인용된 발터 베냐민의 말대로 ‘깊은 심심함’은 창조적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므로 작금의 문화는 예술에 위험한 사태다. 멋대로 덧붙이자면 창작뿐 아니라 수용에 있어서도 ‘심심함’은 중대한 요소다. 후퇴와 역행, 회한과 취소, 무용한 섬광, 소용이 닿지 않는 시간을 음미할 수 없는 세계에서 예술은 위협받는다.
2-1. 벨라 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은 ‘심심한’ 영화들이 모여 사는 행성에서도 북극점이 될 만한 영화다. 평론가 조너선 롬니가 쓴 대로 타르의 영화는 1분 1초의 질량과 밀도를 체감하게 만든다. 모든 지루한 영화가 그런 능력을 가진 건 아니다. 오직 시간을 지배할 줄 아는 감독만이 지속(duration)을 제대로 그릴 수 있다. 타르의 영화 안에서 우리는 대상이 저절로 본질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는 체험을 한다. 벨라 타르 감독이 마지막 영화라고 공표한 <토리노의 말>은 두 인간과 말 한 마리가 절망을 통과해 종말에 이르는 엿새간의 기록이다. 말하자면 <창세기>의 백워드 마스킹이다. 이 영화는 알려진 대로 니체 말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니체는 마부의 채찍질에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말을 토리노 길거리에서 마주친 다음 발작을 일으켜 10년간 정신착란을 앓다 운명했다. 이 이야기가 암시하는 바는 명백하다(그리고 영화 중반부에 극중 인물의 독백으로 재차 확인된다). 니체는 말의 고집에서 극단의 회의(懷疑)를 보았고, 인간을 포함한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이 처한 근원적 절망을 본 것이다.
<토리노의 말>의 관객은 도입부에서 니체를 쓰러뜨린 문제의 말- 혹은 그렇게 보이도록 영화적으로 제시된 말- 이 끄는 수레를 따라 평원의 오두막까지 인도되고, 거기서 나머지 상영시간을 보내게 된다. <토리노의 말>에 등장 하는 비루먹은 말은 카프카의 단편에 나오는 단식하는 광대처럼 건초를 거부하며 절망을 시위한다. 광풍에 고립되고 우물도 말라 어차피 굶어죽을 상황인데, 주려 죽기 전에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형국이다. 검은 갈기를 가진 늙은 말이 이 세계에서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최후의 길은 자살뿐이라는 본능적 각성을 묵묵히 실천하는 동안, 주인 집 부녀는 먹고 입고 자기를 어떻게든 반복하며 생존의 동작을 이어간다. 빨래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고 맨손으로 삶은 감자를 벗겨 먹는다.
<토리노의 말>에는 액션이 없다. 행위만 있다. 이 영화는 염세의 서사이기도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예정된 종말을 뻔히 바라보면서 걸음을 옮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서사이기도 하다. <토리노의 말>은 창세기와 달리, 엿새에 걸친 느린 종말 다음에 안식일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를 보는 데에 소요된 146분이 곧 작은 안식일이었음을 마지막 암전 뒤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깨닫는다.
대중은 <토리노의 말>처럼 느리고 재미없는 영화는 관객을 적대시하고 있다고 단정하고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이를 호평하는 평론가들을 위선자라 비난하기도 한다. 시네필들이란 무릇 중뿔난 체질의 소유자들로서 미니멀리스트 예술영화를 볼 때 전혀 고단하지 않거나, 고단하지 않은 척한다는 가정은 그러나 오해다. 영화평을 업으로 삼는 자들에게도 벨라 타르, 카를로스 레이가다스, 지아장커의 영화를 온전히 깨어서 통과하는 경험은 힘들다. 졸리기도 하다. (내 경우에는 <토리노의 말>을 관람하면서 어떤 것을 스크린에서 보고 듣는 행위만으로도 몸이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쉬워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숙련된 관객은 그 피로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우리의 감각을 조정하고 다른 종류의 쾌감으로 들어서기 위한 문지방이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아프지만 제대로 치러야 개운해지는 열감기에 비할 만하다. 다시 <피로사회>로 돌아가보면 페터 한트케가 말한 ‘근본적 피로’를 인용한 구절이 기다리고 있다. “한트케의 피로는 ‘세계를 신뢰하는 피로’다. 그것은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가 그 속에 새어들어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 (중략) 그것은 모든 감각이 지쳐 빠져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피로 속에서 특별한 시각이 깨어난다. 한트케는 이를 두고 ‘눈 밝은 피로’라고 말한다. 이러한 피로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주의(注意)를 가능하게 한다. 짧고 빠른 과잉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저 길고 느린 형식의 주의 말이다.”(68∼69쪽) 어쩌면 우리는 거꾸로 사고해야 할지도 모른다. 프레임 안에 시간의 궤적을 엄격하게 그려가는 영화를 견디기 버겁다면, 내면의 시계에 어떤 결락이나 고장이 발생한 게 아닐까 의심할 수 있는 것이다.
2-2. <토리노의 말>을 보고 며칠 뒤 <배틀쉽>을 보러갔다. 이 영화는 보여주고자 하는 그림도, 들려주고자 하는 소리도 엄청나게 많아서 (거기에 2억달러를 들였고) 매우 화려하고 시끄러웠는데도 불구하고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기는커녕 뭔가가 행여나 드러날까봐 겁내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도피주의 엔터테인먼트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이 영화에서 그저 현실을, 아니 가속화된 현실을 느끼고 돌아왔다.
3.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이 사회의 정보 배급 방식을 바꾸어놓는 동안, 영화는 어떻게 변했을까. 2001년 이후 만들어진 영화에 관한 일반적 관찰은 다음과 같다.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크림 중 크림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본 얼티메이텀>과 <배트맨 비긴즈>의 평균 숏 지속시간은 2초 미만이다. 할리우드영화의 숏 구성을 보면, 일정 시간 이상 지속되는 미디엄 숏 이하 사이즈의 숏 비중은 낮아졌고 클로즈 숏이 늘어났으며 같은 맥락에서 2인 숏이 줄고 1인 숏이 많아졌다. 그 편이 편집실에서 영화 전체의 템포를 사후적으로 조정하는 작업을 용이하게 해주기 때문이 라는 분석이다. 이 사실을 놓고 보면, 21세기 예술영화의 주류로 대두된 벨라 타르, 지아장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필립 가렐,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슬로 시네마’라는 영화군의 등장은 롱테이크 만능주의 뒤에 숨은 자기 복제라고 비판하기 이전에 자연스러운 문화적 반작용으로서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느린 영화가 곧 좋은 영화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영화가 시간을 다룰 수 있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다. 20세기 초의 영화는 도시화되는 세계의 빠른 박동을 전하는 예술이었다. 그러나 속도의 미학은 1960년대 이후 전위에서 벗어났다. 광케이블과 유튜브가 핏줄처럼 퍼져나간 세계에서는 더욱 저 멀리. 이제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현재 시제를 음미하는 일은 영화에서만 가능해졌는지도 모른다. 한데 어째서 영화만인가? TV는, 개인용 미디어의 모니터로 보는 영상은 왜 아닌가?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사의 경영자들이 바야흐로 극장보다 온라인 비디오 관객을 연구하고 있지 않은가?
3-1. 영화가 유일하게 시간을 발명할 수 있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음악도 시간 예술이지만, 시간을 다루는 순간 필연적으로 물리적 현실의 표면을 끌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어디를 찍은들 거기 삶의 흔적이 없겠는가-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시간을 시간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동시에 영화는, 일상의 급류에 가까스로 삽입되어 있는 TV나 기타 미디어와 다르게 시간의 질과 밀도, 속도를 장악할 수 있는 자치권을 관객으로부터 암묵적으로 (암흑 속에서) 존중받는다.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은 시간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죽음만이 미괄식으로 뜻을 부여한다. 그러나 영화는 삶의 시간을 삶의 시간으로 보존하면서도, 숏과 시퀀스가 끝나는 순간마다 의미를 생산한다. 컷은 이를테면 작은 죽음이다. 그래서 영화는 버지니아 울프의 관찰대로 여전히 현실보다 리얼하며, 삶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우리를 붙잡아 삶으로 데려다놓을 수 있다.
4. 결국 질문은 하나다. 당신은 무엇을 얻기 위해 영화관에 가는가?
4-1. 여기까지 썼을 때 나는 피터 잭슨의 <호빗>과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2, 3편이 초당 48프레임(HFR: High Frame Rate) 영화로 개봉될 예정이고, 대박 콘텐츠를 놓칠 수 없는 극장주들은 영사 설비 교체와 업그레이드 압박에 직면했다는 뉴스를 읽었다.
이것은 데자뷰다. 6,7년 전 카메론은 조지 루카스, 로버트 저메키스 등과 함께 극장 관계자들의 박람회인 쇼웨스트 행사장을 찾아 1950년대 와이드 스크린과 스테레오 사운드가 그랬듯 홈 엔터테인먼트에 만족한 관객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3D 디지털 시네마만이 살 길이라고 설파했다. 아울러 <아바타> <스타워즈> 3D 등의 킬러 콘텐츠를 제시했다. 당시 100개 미만이던 디지털 상영관은 현재 미국 전체 스크린의 절반에 육박했다. 뉴스가 나오고 몇 시간 뒤,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은, 카메론과 3D 관련 장비를 생산하는 카메론 페이스 그룹이 지난해 전미 방송업자연합 컨퍼런스에서 3D가 TV의 미래라고 역설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는 글을 본인의 사이트에 올렸다. 다시 공은 영화쪽 코트로 넘어왔고, 카메론과 친구들은 3DTV에 비해 화면이 어두운 3D영화의 결함을 극복하고 매끄러운 움직임을 제공할 수 있는 HDR영화를 프로모션하고 있는 셈이다.
청산과 업그레이드, 팽창의 무한반복 시나리오. 우리의 질문에 대한 제임스 카메론의 대답은 명백하다. 사람들은 거실 TV에서 즐길 수 없는 더 선명하고 매끈하고 웅장한 영상과 사운드를 체험하기 위해 극장에 간다고 그는 믿는다. 과연 그럴까? 경험을 반추해본 다음 나는 답을 정한다. 아니다. 우리는 ‘쓸데없는 고퀄’ 영상이 아니라, 기상천외한 사건이 아니라, 양질의 시간을 찾아서 영화관에 간다. 그 시간을 극한의 고독 속에서, 또한 동료 인간들 옆에서 음미하기 위해 영화관에 간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호모 시네마쿠스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봉인된 시간>에 쓴 대로다. “인간은 잃어버린 시간, 놓쳐버린 시간, 또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영화관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