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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러브 액츄얼리>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

7명의 영국 노인들이 인도 자이푸르 근방에 모여든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서 처음으로 삶에 부딪혀보려는 여인, 평생의 과오를 바로잡으려는 전직 판사, 은퇴자금에 대한 불안으로 갈등하는 부부, 그리고 수술을 받기 위해 병든 몸을 이끌고 온 이도 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숙소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은 곳곳에 새가 둥지를 틀고, 문짝마저 떨어진 낡은 건물이었고, 이국에서 노년의 여유를 만끽하리라는 기대는 시작부터 어긋나고 만다. 그러나 의외의 상황일수록 느닷없는 로맨스가 싹트기 마련. 호텔의 수상쩍은 요리에도, 도시의 혼잡에도 조금씩 적응될 때 즈음 사랑과 우정의 작대기도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베스트셀러 작가 데보라 모가치의 소설을 원작으로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존 매든 감독이 연출한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은 인도에서 펼쳐지는 황혼의 <러브 액츄얼리>라 할 만하다. 노인들의 동상이몽과 호텔을 꾸려가는 열혈 청년의 사연에 이르기까지, 여러 갈래의 갈등과 화해를 공평하게 다루려다보니, 영화는 도입부부터 서두르는 감이 있고, 전체적인 이야기 구성은 다소 산만하다. 때로 영화의 진행 속도가 여생에 대한 노인들의 조바심마저 앞지르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 점이 결과적으로 노년의 고민을 깊이있게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만든다. 여러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해서, 개별 에피소드들이 피상적인 수준에서 직조되리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의 각본은 매우 ‘안전한’ 노선을 따르며, 위트는 약하고 캐릭터는 상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디 덴치, 매기 스미스, 톰 윌킨슨, 빌 나이 등 베테랑 배우들의 앙상블을 구경하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감동을 남긴다. 특히 매사에 불만을 토로하는 아내 역할을 맡은 페넬로페 윌튼의 연기는 인상적이다. 영화가 담아내는 노년의 페이소스는 주로 이 배우들의 존재감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노년의 희로애락을 별다른 과장 없이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예컨대, 스스로 죽음이 멀지 않았다고 느끼는 노인이 친구의 죽음에 당면해 느끼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이들은 주름진 얼굴과 노쇠한 몸을 통해 매우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두려움과 질투가 관록을 비집고 불거지는 얄궂은 순간도, 수없이 망설이고 겁을 내면서도 더 빨리 결단하고 더 완전히 비워낼 수 있는 노년의 역설도, 명배우들의 존재감으로 인해 설득력을 얻는다.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이 전하는 교훈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솔직함이다. 영화 속 대사대로, 꿈꾸지 않으면 일어날 일도 없을 테니까. “결국에는 다 좋아질 것이고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닐 뿐”이라는 발리우드식 낙관주의를 노배우들은 담담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간명한 삶의 원리로 만들어낸다. 먼지투성이에 노쇠한 메리골드 호텔이 점차 생기를 얻어가는 것처럼, 저마다의 자리에서 머뭇거리던 이들은 마침내 과감히 한 걸음씩 내딛게 된다. 비록 다시 주저앉게 될지언정, 곁에는 그 발걸음을 지그시 지켜보며 응원하는 친구들이 있고, 이들은 훗날 서로의 죽음에 자신의 회한을 얹어 애도해줄 것이다. 그 삶의 깊이를 아직 헤아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들의 용기가 갖는 유쾌한 힘에 대해서만큼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영화가 끝난 뒤에는 노배우들이 몸소 보여준 삶의 지혜를 기억해두는 것이 좋겠다. 편견을 버리고 주변의 아름다움에 관대해질 것, 눈앞의 행운과 실패의 가능성을 사심없이 받아들일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외로움과 욕망에 솔직해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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