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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 김영일이 사는 법 [1]

신하균, 정재영, 임원희, 류승범 키워낸 매니저 김영일이 사는 법

그의 0.1% 가능성에 나는 100을 바친다

“얘가 원래 연극하고 영화에만 나왔는데, 이제 드라마도 하기로 했거든요. 잘 좀 봐주세요.” 1999년 초였나, 매니저 김영일은 한 방송사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당시 신인배우에 불과했던 신하균과 함께 PD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별 반응은 없었다. ‘기막힌 반전’이 벌어진 것은 그로부터 1년 뒤의 일이었다. <공동경비구역 JSA>에 신하균을 캐스팅시킨 뒤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던 김영일은 스스로도 놀랄 만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영화 개봉 직후부터 신하균의 주가는 죽죽 올라갔고, 불과 2년 남짓한 동안에 그는 영화계뿐 아니라 CF 등에서도 톱스타의 자리를 턱 하니 잡았다.

이야기가 이 정도에서 끝났다면 김영일은 그저 수많은 매니저 중 하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연출하고 조연까지 맡았던 ‘역전극’은 시리즈처럼 이어지고 있다. 철부지 아이 같은 류승범을 주말 안방극장의 별로 띄웠고, 임원희와 정재영의 이름을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볼 수 있게 했으며, 이문식과 정규수가 빠진 영화에서 무언가 심심함을 느끼게 하는 등 불과 1∼2년 새 그가 올린 성과는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그냥 ‘수다’라고도 불리는 종합예술창작집단 ‘필름있수다’의 매니지먼트팀 이사 김영일이 앞장서 만들어낸 이 ‘갑작스런’ 성공들은 여느 반짝스타들의 그것과는 분명 모양새가 다르다. 류승범을 제외하면 연극계에서 숱한 세월 잔뼈가 오동통하게 굵었고 온갖 단역과 조역을 소화해왔던 이들이기에, 이들의 뿌리가 쉽사리 뽑히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 모두 10명에 불과한 ‘수다’의 배우들이지만, 활동폭은 여타 화려한 스타들을 숱하게 거느린 거대 매니지먼트 업체 부러울 것이 없다. 빼어난 외모와 화사한 미소 대신 저마다 강한 내음으로 무장한 이들은 현재 영화, 드라마, 뮤직비디오 10여편을 가로지르며 세로오르고 있다.

“배우가 잘나서 성공한 것도 아니고, 내가 키워줘서 그들이 잘된 것도 아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서로에게 100%를 다한 덕에 이런 결과를 본 것이다.” 단순한 듯 들리는 김영일의 이야기는, 하지만 꽤나 힘들었던 지난 일들을 반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대역전극’은 이들이 오랫동안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결실이자, 김영일의 단단한 고집과 매일밤 술잔을 기울이느라 타들어간 식도, 수백권의 시나리오를 읽느라 지친 눈 등이 두루 얽혀 이뤄진 것이란 점 말이다.

배우에서 매니저로

김영일이 배우들의 대역전극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 스스로가 인생을 반전시켜 결국 자신의 길을 찾은 당사자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사실 매니저가 되기 전 그가 하던 일은 바로 연기였다. 애초 연기자 지망생이었던 그는 89년, 당시 서울예대 연극과 연기전공으로 들어간다. 스스로의 입을 빌리면 “입학 초에는 동기생들 중 가장 잘 나가는 축”이었던 그는 연기자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님으로부터 원조를 받을 수 없던 처지였기에, CF모델 등을 하며 스스로 생계를 꾸려갔다. 서울랜드, 옴파로스, 칠성사이다 등 괜찮은 CF에 출연하면서 그는 당시 학생으로선 꿈꿔볼 수 없을 만큼의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93년 제대한 뒤 복학할 때까지는 주로 노래방 배경화면에 출연했다. “갈대밭 같은 데서 그냥 인상만 쓰고 있으면 되는” 연기였기에 하루에 3곡씩 찍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탄할 듯 보였던 그의 인생이 갈림길을 만난 것은 복학한 해인 94년 1학기 말. 한 공연에서 주연을 맡았던 그는 연기의 벽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된다. “가장 큰 게 ‘ㅅ’, ‘ㄹ’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 대사를 씹지 못하고 줄줄 흘린다는 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배우가 한번쯤 겪는 일이지만, 당시 김영일에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그는 공연기획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2학기에는 동기생 장진이 출연했던 졸업공연을 기획하기도 했지만 시간은 그를 졸업장과 함께 교문 밖으로 밀어냈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사회라지만, 사실 그에겐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다. 군 제대 직후 계약을 맺었던 매니저의 존재가 그것이었다.

그런데 졸업 직후인 95년 초 일부 방송사 PD와 연예인 매니저들의 추문이 폭로되면서 그의 매니저까지 “안 좋은 일”을 당했다. 매니저로부터 개런티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허허벌판에 내몰린 그는 방송사 공채시험에도 낙방하는 불운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가 자존심에 입을 상처를 감수하면서 공채에 붙은 친구와 후배를 따라 자주 방송사를 찾아갔던 것은, “언젠가 일할지도 모르는 곳이니 공부삼아 가보자”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주 방송사에 드나들다 보니, 매니저로 취급받기도 했고, 매니저처럼 동료들의 뒤치다꺼리 해줄 일도 많았다. 결국 “어쩌다 보니 매니저가 된” 그는 한 매니지먼트 업체에 취직도 해보지만, 1년 만에 문을 닫자 다시 실업자 신세가 된다.

신하균에게 6개월간 프로포즈

그러던 그가 매니저가 되기 위한 안정된 진입로를 발견한 것은, 97년 ‘활동사진’이라는 매니지먼트 업체를 꾸리고 있던 배우 조선묵을 만나면서였다. 그는 얼마간의 경력을 인정받아 이곳의 실장으로 영입됐고, 이경영, 정흥채, 정원중 등의 매니지먼트 업무를 보게 된다.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곳에서 매니저 일의 기초를 닦았다. 조선묵은 배우 출신답게, 대표 개인이나 회사의 이익보다는 배우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운영방침을 내세웠고, 그 역시 이를 잘 따랐다. 이곳을 그만둔 뒤에는 채정안의 매니저를 하기도 했지만, 가수 데뷔를 준비하는 그녀 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별로 없는 듯해 일을 접었다.

신하균을 만난 것은 그로서는 행운이었다. 98년 장진 감독의 <기막힌 사내들>의 개봉날, 극장 앞에서 김영일은 장 감독으로부터 신하균을 소개받았다.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어 함께 일하자고 제의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신중해서 쉽게 결정하지 않더라. 사실 연극배우 입장에서 매니저라는 사람이 불쑥 다가오니 경계를 했을 수도 있다.” 그로부터 6개월 동안 밥과 차를 사주며 끊임없이 프로포즈를 한 끝에 마침내 신하균의 동의를 얻어냈다. 얼마 뒤 더 멋진 일이 그 앞에 펼쳐졌다. 장진 감독이 ‘수다’ 결성을 제안했던 것. 영화, 매니지먼트, 공연기획 등 다양한 활동을 병행하는 문화집단이라는 새로운 개념에 그는 흔쾌히 동의했고, 정재영, 임원희, 김일웅, 정규수, 이문식 등을 차례로 ‘포섭’해내는 데 성공해 오늘의 ‘수다’를 만들게 됐다.

‘수다’의 배우를 이끌며 그가 추구한 원칙은 다음의 명제들로 대별된다. ‘배우가 못하는 일은 절대 안 시킨다’, ‘배우가 공감하지 않는 작품은 내보내지 않는다’, ‘시나리오나 제작여건이 마음에 안 차도 배우가 하고 싶어한다면 맡긴다’. 웬만하면 소속 배우들을 TV 연예프로그램에 내보내지 않으려는 것이나 신중하게 작품을 고르는 것은 이같은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들 원칙은 매니지먼트계 선배인 조선묵에게서 배운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 자신이 잠깐이나마 배우로 활동할 때 바라던 바였는지 모른다.

그러다보니 불필요한 오해도 많이 산다. 방송사나 주변에서 “너만 잘났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특히 온 충무로가 캐스팅을 위해 전쟁을 치르고 있으며, ‘수다’ 배우들이 상종가를 치고 있는 요즘엔 이런 삐딱한 시선이 더 부담스럽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우리 입장을 잘 이해해주는 편”이라고는 하지만,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는 게 인간사이다 보니 오해를 풀기 위해 직접 나서는 경우가 많다. 자연 술자리도 많아진다. 일주일에 6일은 소줏집에서 룸살롱까지 다종 다양한 사람들과 ‘비즈니스’ 차원의 음주가무를 즐겨야 한다. “초창기에는 배우를 출연시켜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돌아다녔는데, 요즘은 출연 제의를 거절하느라 힘이 든다”는 그의 이야기는 과장이 아닌 듯 들린다.

그에겐 ‘신인급에 연기지도는 하지 않는다. 대신 단역부터 조역까지 여러 편을 시킨다’는 원칙도 있다. 단역을 해보지 않으면 주연을 맡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수년 동안 대학로 무대에서 주역을 맡아온 임승대에게 “넌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처음이다. 익숙해지면 곧 큰 역을 맡을 수 있을 것”이라며 영화에선 단역을 맡기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촬영장을 자주 찾게 한다’는 것도 또다른 원칙이다. “연기의 80%는 자신감”이라고 믿는 그이기에, 촬영장 분위기에 익숙해지면 자연 자신있는 연기가 뿜어져나온다는 것이다.

결국 ‘수다’ 배우들이 속속 스타 대열에 합류하는 데는 배우로서의 경험에 기반한 매니저 김영일의 운영방침이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자신은 “뭐니뭐니해도 ‘수다’라는 그룹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실 김영일의 이같은 매니지먼트 전략도 ‘수다’의 공동체적 성격이 없었다면 이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생도 함께하고 즐거움도 나눠갖는다는 이들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대목은 자동차와 관련된 것이다. 요즘 스타급 연기자치고 억대 외제 밴을 굴리지 않는 경우가 드문데, ‘수다’에는 이런 차량을 가진 연기자가 없다. 대신 ‘카니발’ 승합차 4대가 있다. 이들 차량 또한 지난해 8월 강남으로 이사하며 장만한 것. 이전까지만 해도 소형 승용차와 지프차에 연기자들을 한데 싣고 다녔다고 한다. “우리 연기자들에게 정말 고마운 것은 아무도 이런 것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승합차를 들여왔을 때도 모두 감격적인 표정이었다.”

전문 캐스팅 디렉터를 꿈꾼다

요즘 그의 가장 커다란 고민은 매니저의 ‘태생적 딜레마’에 관한 것이다. 배우들의 성공이 진심으로 기쁘지만, 매니저로선 그들이 자신을 떠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지는 탓에 두려움과 초조함도 더해간다는 것. 연기자 한명의 부침에 따라 그보다 더 큰 폭으로 출렁거리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했던 선배, 동료 매니저들의 삶이 자신에게 일어날까 두렵다는 얘기다. 물론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0%에 수렴하지만,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므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지극히 현실적이며 인간적인 그의 속내다. 아직 스타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신인급 배우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하는 작업도 그에겐 일종의 보험인 셈이다. 결국 매니저와 배우는 보이지 않는 전선에 맞서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매니저는 엄마 같은 존재다. 배우를 자식이라고 한다면, 무슨 일을 하든 그 길을 묵묵히 밀어줘야 하니까. 반면 매니지먼트는 상업주의의 꽃이라는 광고보다 더 상업주의적이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친한 배우라 해도 상업적 가능성이 없는 존재라면 단돈 1원도, 1초도 투자할 수 없다. 반면 0.1%의 가능성이라도 보이면 총력을 기울여 그 가능성을 살려내야 한다.”

이제 햇수로 7년째 매니지먼트업에 종사해온 김영일에게 꿈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배우아카데미 설립이다. 단순한 수익사업이나 ‘수다’의 연기자 수를 늘리기 위한 것은 아니다. 연기를 지도하는 학교와 학원이 숱하게 많지만, 매니저가 원하는 연기자도 따로 있기에 제대로 된 배우를 길러내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가 품고 있는 또 하나의 꿈은 제대로 된 캐스팅 디렉터로서 역할하는 것. 지금도 캐스팅 디렉터로 크레디트를 올리는 매니저들이 여럿 있지만, 자신에게 소속된 연기자 위주로 캐스팅하는 경우가 많아 본래적 의미의 캐스팅 디렉터라 부르긴 어렵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가 하고자 하는 바는, 본격 제작진으로 참여해 시나리오와 캐릭터에 들어맞는 연기자를, 자사 소속 여부와 관계없이 뽑아내는 일이다.

그런데 과연 배우아카데미와 캐스팅 디렉터뿐일까. “올 연말엔 장진 감독이 연출하는 연극무대에 오를 것 같다”며 스쳐지나간 그의 표정에선 새로 기획중인 대역전극의 시나리오가 슬쩍 비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