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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론으로 본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 (1)
2002-01-30

선택된 자의 시련, 요나처럼, 오디세이처럼

새 옷을 입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옛날 옛날 한 옛날의 이야기로구나. 이게 바로 제가 <스타워즈>를 처음 보았을 때 한 생각입니다. 이 영화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통하는 언어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어요. 너는 가슴으로 사는 사람, 인간성을 섬기는 사람이겠느냐 아니면 ‘음험한 세력’이 요구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겠느냐 묻고 있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스타워즈>는 단순한 도덕적 드라마가 아닙니다. 이 영화는 인간의 행동을 통해 성취되거나 부서지거나 억압되는 포스, 생명의 힘을 다루고 있으니까요.

조셉 캠벨(신화학자),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 중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현대판 오이디푸스의 화신과 미녀와 야수 속편은 41번가와 5번가가 만나는 네거리에서 교통신호가 바뀌길 기다린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갈파한 현대의 문명 속에 깃든 신화의 원류의 모습은 이런 식이다. 황색 잡지에 나오는 손수건을 쥐어짜는 인생유전의 드라마를 읽을 때처럼 그것은 믿거나 믿지 않거나의 문제이지만, 신화를 믿게 된다면 이윽고 미스 유니버스 대회를 넋놓고 바라보는 우리와 그 옛날 그리스의 언덕에서 헤라와 아테네, 아프로디테의 세 여신을 두고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뽑아야 했던 목동 파리스의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주장도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점은 <반지의 제왕>의 창조자 존 로널드 로웰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 1892∼1973)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새로운 언어를 짓는 취미가 있었고 이외에도 각 나라의 신화와 민담을 채집한 뒤, 이윽고 신화가 언어처럼 거대한 한 뿌리의 심리적 원형에서 나와 가지를 치고 변종이 생기고 이야기라는 위장 전술 속에 숨어 사는 생명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중세 언어, 라틴어, 웨일즈어, 고대 영어를 녹여서 <반지의 제왕>과 실마릴리온의 엘프의 언어 속에 집어넣어, 시간과 싸워 이긴 영원불멸의 전사가 되었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하나의 거대한 세계이다. 그것을 보거나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영토와 새로운 지도, 새로운 습관과 새로운 신체를 지닌 피조물들이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각자의 역사를 전승하고 각자의 무늬와 각자의 자연과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거대한 우주를 영접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학자들이나 작가들이나 귀족이 아니라, 어느덧 반지의 시민이 되어버린 아주 평범한 독자들에 의해 서서히 완성되어 나아간 어떤 세계이기도 하다. 신화와 언어의 복원을 통해 시공을 초월하려 했던 톨킨의 지난한 몸짓은 독자들과 연합하여 이윽고 <반지의 제왕>을 역사가 전설이 되고, 전설이 신화가 되는 거대한 우주의 문 앞까지 밀고 올라간 것이다. 이윽고 <반지의 제왕>은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는 작은 고리, 새로운 신화의 제왕이 되었다.

성배 콤플렉스를 뒤집는 신화

톨킨이 뛰어난 이야기꾼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지만, 문헌학자인 톨킨의 취향대로 <반지의 제왕>의 플롯 중 일부는 유난히 눈에 익은 것이기도 하다. 우연히 손에 얻은 보물이 주인공들의 운명의 궤도를 이탈시킨 이야기는 현대의 복권 당첨자의 ‘그날 이후’에도 적용되는 무수한 변형을 지닌 신화의 한 종류이기는 하다. 바그너가 오페라로도 만든 ‘라인의 황금’은 전사이며 치료자인 발퀴레와 엘프의 유사성을 등에 엎고 가장 빈번히 <반지의 제왕>과 비교되는 단골손님. 파라오의 꿈을 해몽한 덕택에 반지를 얻고 출세하였으나 이로 인해 다시 파라오의 시기를 받는 요셉이나 존 스타인벡이 지은 <진주>에서 바닷속 깊이에서 따온 거대한 부를 약속하는 흑진주를 다시 심해의 밑바닥으로 돌려보내는 어부 키노의 손길에도 반지의 운명은 어려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반지의 절정은 그것을 버리는 행위에 있다. <반지의 제왕>이 놀라운 것은 서양의 성배 콤플렉스를 뒤엎는 반지라는 작은 물건에 녹아든 톨킨의 사회적·심리적 통찰력일 것이다. 성배와 달리 반지는 사악하기 짝이 없다. 반지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권력의 욕망과 그것을 이용하고 싶은 강력한 악의 유혹에 시달리게 만든다. 또한 깊은 동굴에 가만히 앉아서 주인을 기다리는 수동태의 성배와 달리 항시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하는 반지의 태생 또한 훨씬 의인화되고 역동적인 애증의 관계를 소유주와 반복한다. 전사 보로미르는 처음도 끝도 없는 애물단지인 반지를 앞에 두고 이렇게 독백한다. “이 작은 것에 그토록 많은 두려움과 의심을 품어야 하다니….”

따라서 반지를 낄까 말까 고뇌하는 주인공들은 바로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받아들일까 말까를 고뇌하는 존재론적 피조물이 되고, 동시에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톨킨의 강력한 주술에 사로잡힌 가엾은 넋들로 산화한다. 그래서 반지는 탐욕과 분노, 권력의 부패와 무소유의 현명함을 설파하는 장대한 서사시이며, 그래서 반지는 암흑의 무한동굴과 천상의 신전 사이를 오르락거리는 무한궤도의 시시포스의 노래이기도 하다. 피터 잭슨은 자신의 모국인 뉴질랜드의 원시 자연과 할리우드의 특수효과를 효과적으로 결합시켜 마침내 역사상 그 어떤 감독도 해내지 못한 장대한 시각적·심리적 원형을 관객에게 안겨주는 일대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다. ▶ 신화론으로 본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 (1)

▶ 신화론으로 본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