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붕 탈출법’을 알려달라는 지인들에게 퉁명스럽게 답하곤 했다. “멘붕 올 시간이 어딨니? 도처에 벼랑이다.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사람들에게 멘붕 따윈 사치라고.” 그렇게 질러놓고는 혼자서 시무룩해져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 무렵 영화 <레미제라블>을 봤다. 앤 해서웨이가 부른 판틴의 주제가 <I dreamed a dream>을 듣다가 결국 펑펑 울었다. 그날따라 무방비하게도 내 가방 속에는 손수건도 휴지도 없어서 옷소매가 눈물 콧물로 빤질빤질해졌다. 극장에서 돌아와 퉁퉁 부은 눈으로 유튜브를 검색했다.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수잔 보일이 부른 <I dreamed a dream>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수잔 보일의 영상은 따뜻한 강인함과 희망의 느낌이 확실한 것이었기에 나는 위로를 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또 울고 말았다. 어릴 적부터 가수가 되고 싶었다는 그녀에게, 근데 왜 여태 가수가 되지 못했냐고 심사위원이 다소 삐딱하게 물었을 때,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기회를 갖지 못했어요.” 오래전 그녀의 영상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분명 그녀로부터 어떤 감동을 받았고 그 감동은 따뜻한 희망을 동반한 것이었는데, 그날따라 심지어 그 영상조차도 슬펐다. 맥주 캔을 따다가 갑자기 눈물이 또 터졌고, 눈물로 범벅되어 찝찌름해진 맥주를 마시다 지쳐 잠든 밤에 판틴의 노래를 또 듣고 말았다. “내가 꿈꾸었던 세상은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삶이 내 꿈을 죽여버렸네…”라고 노래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을 꿈에서 보았다. 내가 본 많은 사람들 속에 나도 있었다. 너무 많이 울어서 더이상 우는 것이 힘겹다고 느낄 즈음 간신히 깊은 잠으로 빠져들 수 있었고, 아주 오래 자고 일어났을 때, 나는 가볍고 명랑해져 있었다. 지독한 슬픔과 명랑 사이가 고작 하룻밤 사이라니, 이거 원 참!
약간의 겸연쩍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갑자기 이런 메시지를 몇몇 지인들에게 보냈다. “새해 행복합시다! 악착같이~. ^^ 놀아줄 테닷. 행복하고 말 테닷. 파티, 파티하며 살 테닷!” 그래서 며칠 전에 ‘희망버스’를 탔다. 대한문 옆에 차려져 있는 ‘함께 살자, 농성촌’이나 ‘강정마을’, ‘희망버스’에서 만나는 사람들 생각을 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최근 내가 만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 거기에 있다. 자기 삶의 의미에 민감하며 동시에 타인의 삶에 따뜻한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살며 ‘공공선’이라 불릴 세상의 아름다움과 선함에 저마다의 몫으로 함께하려는 사람들. 그들은 내게 ‘사람이 아름다운 이유’에 대한 세목을 조목조목 느끼게 해준다. 세상의 이해관계를 떠나 진심을 다해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괜찮지 않은가 삶은! 도처에 ‘레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 Les Miserables)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의미와 삶의 품위 역시 그 속에서 함께 싹튼다. 슬플 때 맘껏 슬퍼하고 우울할 때 맘껏 울자.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한,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