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에는 누구나 극도로 두려워하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우연히 들은 무서운 이야기에 겁에 질려 화장실에도 가지 못하고 어머니의 빨랫감을 추가하여 분노의 폭탄을 맞았다든가 이야기책에서 읽은 괴물이 금방이라도 자신의 방 문을 열고 오지 않을까 무서워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밤을 새우는 정도의 경험을 지금은 모두 웃고 넘길 수 있지만 당시의 절절한 무서움이란.
이 시기의 공포에는 몇 단계가 있다. 먼저 유아기를 갓 넘어서서는 어떤 거대한 상상의 존재(공룡 따위)에 대해 무조건적인 두려움을 느끼며, 사리를 어느 정도 아는 어린이 시절에는 좀더 구체적인 존재를 두려워하게 된다. 어린이 생매장 납치범이 탈옥했다는 뉴스를 보았을 경우 납치범이 반드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지목하여 찾아올 것이라는 식의 공포감이다. 성인들이 보기에는 당연히 농담 같은 말이지만 아이 자신에게는 리얼한 무서움이다. 아마도, 이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우연이 존재한다는 것을 갓 감지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 때문 아닐까. 그리고 사춘기에 접어들면 비로소 소소한 생활 전반에 대한 과민한 걱정쯤으로 두려움의 수치는 내려간다.
<엑소시스트>를 보았던 것은 무조건적인 두려움에서 구체적인 두려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정도였다. 멋도 모르고 사촌언니, 오빠들이 보는 것을 따라 보다가 너무나 무서워 방을 뛰쳐나가고서도 문을 빠끔히 열고 문 틈으로 훔쳐보았던 것은, 과연 리건에게서 저 못된 귀신들이 나갈까 무척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결국 못된 귀신은 나갔지만, 대신 신부가 두명이나 죽어버렸다. 리건의 엄마는 자기 딸 때문에 서너명이나 죽어나갔다는 것은 신경도 안 쓰는 얼굴로 홀가분하게 떠나버렸다. 그녀가 미웠다. 내가 리건이었다면 제일 먼저 그 창문에서 뛰어내렸을 것이다. 여러 사람 피 보지 않도록 깔끔하게, 깨끗하게. 그리고 엄마를 따라 이사갈 때의 리건처럼 천진하고 맑은 얼굴로도 절대 있지 못했을 것이다. 죄책감이야말로 인간을 좀먹는, 유치한 욕이나 몇 마디 하고 머리통을 180도로 돌리고 거미처럼 후닥닥 걷는 조무래기 악마 따위보다는 가장 은밀하고도 커다란 사탄이니까. 데미안 신부가 차라리 악마를 자기 몸에 담고 까마득한 계단 아래 피를 쏟는 것을 택했듯이.
10여년 전 공포는 <엑소시스트>를 통해 내게 찾아왔다. 아버지에게 마귀새끼라는 꾸지람을 듣고 나서부터는 아침에 일어나서 목이 180도로 돌아가는지 꼭 확인했다. 정말 마귀가 우리 아버지라면 깜깜한 밤중에 자기 자식인 나를 찾으러 오지 않을까 하여 그 아버지가 제발 자신의 다른 자녀들에 정신이 팔려 나라는 존재는 잊고 있기를, 우습게도 몇번이나 간절히 바라며 이불을 뒤집어 쓴 채 기도했던 것이다.
그 진짜 아버지가 찾아와서 내 요를 흔들어댈까봐 극도로 두려웠던 어느날은 베개를 끌어안고 부모님의 방에 찾아가 여기서 재워달라고 훌쩍거렸다. “네가 마귀를 무서워하는 것은 네 안에 마귀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과 함께 내쫓기고는 밤새 문을 두드렸으나 성서에서는 그러면 열릴 거라더니 의외로 목사에게는 통하지 않는 구절인 모양이었다. 목을 놓아 울어도 무반응이었다. 울다 기운이 사라져 악이 받친 나머지 그 아버지, 나의 악마 아버지에게, 올 거라면 지금 찾아오라고 기원하고 목을 돌려보았지만 그 각도는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물론 그는 예기치 않은 방문을 대단히 즐기는 부류이므로 이쪽의 초대 따위는 중히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육신의 아버지와 정신의 아버지에게 모두 버림받은 날부터는 수면에 별 지장이 없었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좋게 끝난 것이 아니라, 자포자기해버렸던 것이다. 모든 귀결 중에서도 이것이 최악이다. 대꾸해주지 않는 데 익숙해져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마귀가 찾아오는 것이 낫다. 하지만 이제는 신도 악마도 그렇게 한가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안다. 우리가 올리는 기도의 대부분은 천국에서 별 필요하지도 않은 귀찮은 청구서라든가, 수신거부 목록에 추가하고 또 추가해도 끈덕지고도 구차하게 날아오는 스팸메일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김현진/ 21 the Suicide Bl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