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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여성, 평론가로 산다는 것은
2002-02-21

<나쁜 남자> 찬반 논쟁을 지켜보며

또다시 김기덕 감독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고 <씨네21> 편집장이 밤 늦게 전화를 했을 때 잠결에 부시시 일어난 나는 ‘그런 재미 없는 게임’하지 말자고 거절했다. 편 쫙 갈라서 ‘김기덕은 작가다 아니다’ ‘그는 여자를 성기 취급한다 아니다’라는 남녀 청백전은 하지 말자는 것이다. 세상에 재미 없는 게 남자는 남자편 여자는 여자편 드는 게임이다. 차라리 남성 평자인데 김기덕 감독을 좀 삐딱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여성 평자인데 김기덕 감독을 비교적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그런 교차된 시선으로 논의를 전개해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더니, 편집장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저 그것이 궁금했다. 어떻게 하면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여성의 입장에서 편하게 그리고 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또한 김기덕 감독이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이 저널리즘의 광풍 속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남성 평자는 없는 것일까?

그런데 며칠 후 다시 전화가 왔다. 편집장은 내 말대로 ‘이곳 저곳 찾아보았으나 그런 평자가 거의 없더라’는 것이었다. 대체 우리나라 평론 바닥에서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번에야말로 진지하게 김기덕 감독에 대해서 논쟁을 이끌어가겠다는 다짐과 함께 편집장은 그냥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하다.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 미안하다는 소리와 평소 존경하던 정성일 선생님과 한 지면에 글을 같이 쓰게 된다는 그래서 이번에는 좀 치열하게 김기덕론을 이끌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기호학적으로 평론을 한다고 해서 기호학자라고 부르지도 않고, 구조주의로 평론을 한다고 해서 구조주의자라고 부르지 않는데,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페미니스트가 된다. 가끔 어떤 인터뷰에서 ‘페미니스트냐?’고 질문을 받을 때마다 페미니즘 평론을 하지만 페미니스트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내 생각에 페미니스트 자격의 핵심은 ‘행동적 실천’에 있다고 믿는다. 그 점에 있어서 가난한 맞벌이 부부를 위해 무료 놀이방을 운영하는 여대생들이 나보다 더 페미니스트 아닌가. 게다가 더 엉뚱하게 사람들은 은근히 페미니스트들끼리 맞장 뜨는 모습이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보다. 한 영자 신문에서는 나와 유지나 선생님을 각각 비교하는 인터뷰를 실고(사실 내게는 단독 인터뷰라고 속였다), ‘그들은 절대 점심도 함께 한 적이 없는 사이다’라고 써놓기까지 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그 전전날에도 점심을 같이 먹었고 지금도 가끔 밥을 같이 먹는다.

왜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것일까? 대한민국에서는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페미니스트가 되고 논쟁이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비판이 아닌 위협에 가까운 악담을 듣는다. 이번 김기덕론도 마찬가지였다. 유림 페미니스트. 페미 파시즘. 보지 평론. <씨네21> 독자평란에는 김기덕 감독과 심영섭을 결혼시키자고 하는 멜로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 같은 독자도 있었다.(아쉽게도 나는 임신 4개월째라 그건 힘들 것 같다. 태교에 너무 좋은 <나쁜 남자>를 세번 본 것으로 족하다.) 서구에서는 이미 주류 이론의 일부가 된 그래서 아무도 핏대를 올리지 않는 페미니즘이 우리나라에 오면 개인적인 감정을 실은 공방으로 비화된다. 그 사실 자체가 페미니즘이 머리 따로 몸 따로, 이론 따로 행동 따로의 따로 국밥으로 놀고 있다는 증거는 아닌가.

정작 정말 슬펐던 것은 그 다음 주 <씨네21>을 받아본 순간이었다. 아니 정성일 선생님과 김기덕 감독이 인터뷰를 했잖아. 김기덕 감독은 온 만방에 이미 아무하고도 인터뷰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터였다. 게다가 정성일 선생님은 김기덕론의 맨 마지막에 쓴대로 악어 같은 나쁜 평론가가 아니었다. 김기덕 감독에게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시겠다고 하더니, 벌처럼 날아서 나비처럼 쏘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이번 김기덕론을 둘러싼 이벤트와 해프닝들은 저널리즘의 무등을 올라타고 얼마나 쉽게 대한민국에서 한 감독이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지, 과연 평론가란 감독이란 거인 위에 올라탔기 때문에 조금 더 잘 보이는 난쟁이에 불과한 존재인지, 무엇보다도 이 땅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풀고 진짜 이 땅의 여성들을 위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자문케 한다.

나는 김기덕 감독과 인터뷰한 적이 없다. <섬> 때부터 두번 다 김기덕 감독과의 인터뷰를 거절당했다. 그러나 텍스트 안에서 텍스트와 직면하는 일은 그림자와 싸우는 일일 뿐이다. 나도 이제는 김기덕이란 ‘감독’을 ‘만나’고 싶다.

개인적으로 김기덕 감독이 <나쁜 남자>에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과연 “여대생과 깡패는 한 벤치를 쓸 수 없는가?”라는 질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김기덕 감독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과연 “‘저격수’로 불린 여자 평론가와 ‘저격당한’ 남자 감독은 한 벤치를 쓸 수 없는가?” 이제는 김기덕 감독에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kss1966@un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