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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되세요` 유행시킨 BC카드 광고
2002-02-21

애교있는 직설화법

‘카드시장의 결투’가 불꽃을 튀기고 있다. 그 열기가 최근 몇년 동안 광고계의 흐름을 ‘들었다 놨다’ 해온 이동통신 브랜드 못지않게 뜨겁다. 지난해 천문학적인 시장규모를 기록했다는 카드업계 주자들이 브라운관에 홍수를 이뤄 저마다 ‘날 좀 봐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다. 경쟁이 치열한 곳에 크리에이티브의 향연이 벌어지게 마련이란 공식에 기대면 앞으로 한동안 소비자의 눈을 사로잡을 대표적인 분야는 바로 이 신용카드 CF일 가능성이 높다.

이번에 특별히 주목할 대상은 BC카드 CF다. 카드 광고에 대한 소비자의 인지도를 어림잡으면 선두권을 형성하는 예로 늘 앞서가는 ‘만능 우먼’ 이영애의 LG카드 광고, 남성의 엉덩이를 후려치는 발칙한 고소영의 삼성카드 광고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광고는 현재 ‘이영애의 하루’와 등식관계의 ‘배용준의 하루’(LG카드), 능력있는 남편(정우성)을 둔 ‘행복한 미시족’ 고소영의 모습(삼성카드) 등으로 ‘버전업’을 시도하며 인지도 강화에 나서고 있다. 다른 빛깔의 모델 및 전략으로 승부를 걸고 있지만 ‘꿈의 공장’으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둘은 닮았다. 소비자의 눈높이를 위로 끌어올려 카드소비를 통해 멋진 삶에 대한 욕구를 채우라고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지난해 말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BC카드 광고는 위풍당당한 이들과는 다른 길을 취했다. 황수정이란 모델에게 서부영화의 총잡이란 독특한 배역까지 맡겼음에도 이렇다할 성과를 얻지 못해오다 모델(김정은)과 캠페인 테마를 수정해 반격에 나섰는데 그것이 제대로 통한 것이다.

BC카드는 전통적이고 대중적인 이미지를 자랑하는 브랜드다. 그래서인지 입을 앙다문 채 재도약의 의지를 다지고 있는 비장한 속내를 감춘 채 새 캠페인에서 ‘쉽고 만만하게 말걸기’를 외양으로 택했다. 보통 남들이 잘났다고 외치고 있을 때에는 그것을 능가하기 위해 더 잘난 척을 떨기가 십상인데 오히려 몸을 낮추는 전술을 구사했다는 것은 의외다. 김정은을 주연으로, 그리고 장미희와 이문세를 조연으로 기용한 첫탄은 짧은 소극의 모양새를 띠었다. 매장에서 중년의 신사(이문세)와 숙녀(장미희)가 물건값을 현금으로 결제하려고 하자 오지랖 넓은 젊은 여성(김정은)이 호들갑을 떨며 그들의 행동을 제지한다. 김정은은 그들의 귀에 입을 밀착해 무엇인가를 열심히 재잘거린다. BC카드로 결제하는 게 얼마나 이로운지 훈수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정은의 얘기를 쫓아 점잖은 신사숙녀는 현금 대신 카드로 결제한 뒤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이어지는 마무리 메시지. ‘BC로 사세요.’

첨에 이 광고가 낳은 반응은 이랬다. ‘유치해!’

‘BC로 사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추가설명은 필요없을 것이다. 이렇게 속이 투명한 솔직한 메시지도 드물 터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귓속말을 전하는 장면은 무슨 팬터마임마냥 대사 대신 현악기 연주를 배경에 깔아 빨리감기의 전개효과를 살리면서 가벼운 웃음을 자아낸다. 모델들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박자에 맞춰 고개를 갸웃하며 익숙한 멜로디에 맞춰 ‘BC로 사세요’를 합창하는 장면 등도 철저히 ‘모든 연령 관람가’의 수준이다.

이 CF는 BC카드가 여성전용카드처럼 특정 타깃을 향한 브랜드가 아님을 고려하더라도 지나치게 폭넓은 대상을 겨냥한 쉬운 화법을 구사한 것 아닌가 하는 다소 아슬아슬한 인상을 줬다.

BC카드 광고의 특징이 고유의 매력으로 한 단계 도약한 것은 신년광고를 통해서. 김정은이 설원에서 눈사람 주위를 빙빙 돌며 “여러분∼, 여러분∼, 부자되세요. 꼭이오”를 외치는 ‘신년 레터’ 형식의 이 광고는 강한 반향을 낳았다. 카드를 팍팍 긁으라고 권하는 신용카드 광고가 부자가 돼라고 말하다니. 이런 어불성설이 없을 듯싶은데 광고의 정체성을 떠나 ‘부자되세요’란 말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보다 더 새해 덕담으로 위력을 떨쳤다.

벙어리 장갑을 낀 채 뒤뚱거리며 눈밭을 뛰어다니는 김정은의 모습은 천진한 아이, 그 자체다. 그런데 쉬운 얘기인데도 한마디한마디를 꼭꼭 씹어 전하는 그의 말투는 유치원 아이를 가르치는 친절한 선생님 같다. 이 상반된 특징이 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애교있고 살갑게 소비자의 가려운 데를 긁어준다. 이영애나 고소영의 ‘프리미엄’ 이미지와 다른 김정은의 일상적인 매력은 BC광고의 노선과 절묘한 화음을 빚어냈다.

지극히 통속적인 직설이지만 일상의 영역에서 소비자의 공감을 사는 말을 정확하게 낚아챘다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 CF의 성과이자 힘. 붉은빛과 흰색의 간결한 색채감각을 살린 영상미도 시각적으로 산뜻한 기분을 안겨준다. 이 신년광고의 뒤를 이어받은 봄철 CF는 노란 빛깔로 컬러변신을 이뤄 김정은의 입을 통해 ‘BC로 사세요’를 반복하고 있다.

BC카드 광고는 미지의 영역을 건드린 발상의 독특함이나 독해의 카타르시스가 있는 광고와 정반대의 지점에 서 있다. 흔히 좋은 광고의 미덕으로 불려온 것들을 싱겁게 무너뜨린다. 그럼에도 이 CF가 대중과 소통하는 데 성공한 걸 보면 귀찮고 피곤하게 집중을 유도하기보다 부담없이 다가오는 휴식 같은 친구를 원하는 요즘 소비자의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제작연도 2001년 광고주 BC카드 대행사 다이아몬드베이츠 제작사 죤 앤 룩스(감독 채은석) 조재원/ 스포츠서울 기자 jone@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