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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요소를 새롭게 포장한 드라마 <여우와 솜사탕>
2002-02-21

버무림의 손맛

“시대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클래식 명곡들에는 청중이 음악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기대하고 예측하는 친숙한 선율이 새로운 음악적 시도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현대사회의 다양한 일상과 문화상품을 물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해 큰 화제를 뿌린 <과학콘서트>의 저자 정재승씨가 한 북리뷰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한 말이다. 정재승씨가 말한 ‘익숙함과 새로움의 조화’는 사실 오래 전부터 모든 문화상품들이 추구해온 성공의 원칙이다.

음악뿐만 아니라 영화, 문학 등 예술의 여러 장르에서 두 성향이 효과적으로 어우러졌을 때 사람들은 열광한다. 그러나 문제는 비율이다. 아직 새로움과 친숙함이 얼마의 비율로 섞였을 때 가장 좋은 작품이 되는지 그 황금비를 입증하는 방정식은 없다. 프랙탈과 카오스 이론이 등장한 지금에도 그 배합은 여전히 예술가의 눈대중, 손대중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정확한 객관적 계측없이 이루어지는 이 비과학적인 작업의 ‘손맛’에 우리는 울고 웃는다.

MBC 주말극 <여우와 솜사탕>은 그런 ‘버무림의 손맛’을 잘 느낄 수 있는 드라마 중 하나이다. 주간 평균시청률 30%가 넘는 <여우와 솜사탕>은 현재 방송중인 MBC 드라마 중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작품이다. 하지만 <여우와 솜사탕>이 이런 인기에 걸맞게 참신하고 기발한 소재를 다루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일부 비판적인 평자로부터 ‘김수현 드라마의 장점들만 벤치마킹했다’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이 드라마에서는 예전 히트 드라마의 특징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가부장주의의 완고한 아버지와 그에 못지않게 권위적인 아들, 남편의 위세에 눌려 자기 목소리 한번 제대로 내지 못하는 어머니라는 인물 설정은 ‘대발이 신드롬’을 일으켰던 김수현 극본의 MBC 주말극 <사랑이 뭐길래>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서로 사돈지간인 양쪽의 어머니가 알고 보니 옛친구이고 그로 인해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했던 갈등구조이다. 이미 여러 차례 검증된 주말 코믹 홈드라마의 전형적인 인물구성과 플롯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을 따진다면 <여우와 솜사탕>은 그리 좋은 점수를 받을 드라마가 아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이런 진부한 면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곳곳에 시청자의 눈길을 끄는 매력들을 담고 있다. 두 주인공 봉강철(유준상)과 안선녀(소유진)는 12살 터울의 띠동갑인 386세대 ‘아저씨’와 20대 초반 신세대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재미를 주고 있다. 비록 조금 과장된 성격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세대 차이에서 오는 아기자기한 사건은 오히려 비슷한 또래가 펼치는 사랑보다 극적인 재미가 좋다. 드라마 초반 갈등을 주도했던 양쪽 어머니의 치열한 설전도 이 드라마에서 느낄 수 있는 잔재미 중 하나이다. 짧은 단문으로 치고받는 두 어머니들의 설전은 세상 살 만큼 산 어른들의 갈등으로 보기에는 사실 좀 유치하고 억지스런 부분이 많다. 하지만 고두심과 이경진, 두 중견 연기자가 무르익은 연기력으로 펼치는 힘겨루기는 모처럼 ‘보는 연기’의 진수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보다 이 드라마를 더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내용상으로는 얼마되지 않지만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현실 묘사이다. 큰돈 만져보겠다고 주식에 투자했다가 억대의 돈을 날린 봉강철의 모습은 요즘 급변하는 사회 현실 속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그리고 있다. 조그만 주방가구 공장을 운영하는 봉강철의 아버지가 납품을 하면서 겪는 세상의 팍팍함은 근검과 절약만을 최고의 경영기법으로 삼아왔던 기성세대의 좌절이라는 점에서 찡한 느낌을 준다.

“뭐 기껏해야 드라마의 재미를 위한 양념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폄하할 수도 있지만, 화사하고 현란한 시각적 코드가 인기 드라마의 전부로 여겨지는 요즘 추세에서 이런 작은 ‘리얼리티’는 드라마의 맛을 깊게 하는 효과를 주고 있다. 이는 <서울의 달>에서 극적 재미와 삶에 대한 진솔한 묘사로 주목을 받았던 연출자 정인 PD 특유의 ‘손맛’이기도 하다.

장안에서 맛의 명가로 인기 높은 음식점을 보면 의외로 특별한 재료나 비법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 집들이 사랑받는 배경에는 대개 평범한 재료들을 버무리고 조리한 절묘한 손맛이 숨어 있다. <여우와 솜사탕>이 진부하고 평범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사랑받는 데는 이런 요소들을 적절한 비율로 섞고 거기에 시대에 맞는 코드들을 가미한 절묘한 ‘배합비’가 숨어 있다. 세상사가 늘 새롭기만 하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김재범/ 스포츠투데이 기자 oldfield@st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