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의 봄이 오는 길목. 노영석 감독은 준비하던 시나리오를 마무리하기 위해 지방의 외진 휴양림 펜션에 잠시 들어가기로 한다. 그러다 휴양림 인근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덜컥 한 사내를 만난다. 교도소에서 나온 지 며칠 안 됐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동네 토박이. 그는 지나친 친밀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걸 거절하면 언제 돌변할지 모를 거라는 위협적인 인상도 함께 전한다. 감독은 그날 밤 술이라도 한잔하자며 그가 숙소로 불쑥 찾아오면 어쩌나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한편으론 짜릿한 창작에의 자극을 받은 나머지 공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원래 쓰려던 시나리오는 뒷전으로 미룬 채 그 남자의 정체를 상상하며 한편의 시놉시스를 쓰고 있다. 외지에서 만난 감당할 수 없이 친절하고 또한 위협적인 한 남자. 그가 노영석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조난자들>을 추진시켰다.
-이 영화의 동기가 된 그 남자와의 만남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면. =휴양림이 있는 마을 정류장에서부터 나를 자꾸 쳐다보더라. 그냥 좀 피했다. 머리가 짧고 염색을 했는데 잘생긴 얼굴이었다. 눈도 부리부리하고. 사연이 있어 보이더라. 그런데 버스에서 한사코 자기쪽으로 오라는 거다. 버스엔 우리 둘뿐이었다. 계속 말을 붙여서 불편할 정도였다. 뭐 하러 펜션에 가냐고 물어서 그냥 글을 좀 정리할 게 있다고 했더니 대뜸 “글 쓰는 거 그거 좋은 거”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자기는 요즘 시간이 정말 많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왜 시간이 많았냐는 이야기를 안 물어볼 수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랬더니 자기가 감옥에 다녀왔고 독방에 있어봤다면서 나보고도 독방에 있어봤냐고 물어보는 게 아닌가. (웃음) 그런 대화가 영화에 다 들어갔다.
-실제로 있었던 일화가 영화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나. =영화에서처럼 내 신발끈을 리본으로 묶어준 정도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헤어지기 전까지 초반부의 일은 거의 그대로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버스에서 내려서 다시 택시로 갈아타려고 했을 때, 택시 밖에 서 있던 그가 내게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주면 안 될 것 같아서 배터리가 떨어졌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랬더니 그만 기사 아저씨가 펜을 빌려주고 그가 자기 번호를 내게 적어주는 거 아닌가. 다행히도 내 번호를 받아가진 않더라. 그런데 이번엔 또 별안간 수고비를 달라고 하는 거 아닌가. 무슨 수고비를 말하는 거지? 이 사람이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돼 돈이 필요한가, 담뱃값이라도 좀 줘야 하나 싶어서 몇 천원을 줬다. 처음엔 받더라. 그러더니 또 장난이라고 하면서 택시 안에 던져주더라. 그 광경을 보던 택시 기사 아저씨는 불안한 내 마음도 모르고 “여기 사람들 참 친절하지요” 이러는 거다.
-그 와중에도 창작력이 자극되는 야릇한 쾌감 같은 걸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쾌감이 들기는 하더라. 그날, 그 사람이 오면 어쩌나 걱정이 되면서도 그와의 만남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하며 내가 시나리오로 쓰고 있는 거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는데도 시놉시스 중간까지 한달음에 쓰게 되더라.
-그럼 언제 다시 이 아이디어를 꺼내서 구체화하기로 했나. =2012년에 다른 작품을 준비 중이었다. <불면증>이라는 시나리오였다. 그즈음 CJ엔터테인먼트하고 얘기가 오가고 있었는데 <불면증>은 일단 대사가 너무 없고 분위기도 어두우니 전에 써봤던 걸 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원신연 감독의 영화 <구타유발자들>을 좋아한다고 알고 있다. 좀전에 말한 그런 일들을 겪고 또 정리하면서 문득 그 영화를 의식하게 되진 않던가. =그 영화를 좋아하니까 생각이 났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오히려 내가 그 영화 속 인물처럼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어서다. 어느 동네의 텃세나 공포 같은 거. 재수할 때다. 여름에 어디 한번 놀러가자는 마음에 대성리인가 강촌인가에 가기로 했다. 두 친구는 하루 전에 가 있고 나는 그 다음날 가기로 했다. 그런데 다음날 가니까 어째 두 사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거다. 알고 보니 그 두 사람이 전날 동네 젊은이들하고 어울려 술을 먹었는데 한 친구가 잘난 척을 좀 하다가 동네 젊은이들에게 두들겨맞은 거다. 그런데 또 한 친구는 사실 동네에서 잘나가는 형이었다. 그런데 그 형이 그걸 못 막아준 거지. 그래서 분위기가 이상했던 거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어제 안 오길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여행 중 그런 경험이 또 있었나. =있다. 그걸 이번 <조난자들>에 넣었다. 숲속에서 만났던 밀렵꾼들 이야기다. 대학 입시 공부할 때 내게 가장 위로가 됐던 게 여행책자였다. 그래서 시험보고 나서 바로 친구 하나와 여행을 갔다. 춘천 지나 홍천쪽으로 가던 참이다. 아침에 숲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커먼 남자 둘을 만났다. 그들도 우리를 좀 경계하더라. 저 사람들은 뭘까. 산에서 사람을 만나면 무섭다는 얘기가 뭔지 그때 알았다. 얼른 빠져나와 길가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려고 하는데 아까 그 사람들이 차를 타고 지나가는 거다. 저 사람들이 태워준다고 해도 우리 그냥 타지 말자, 하고 친구와 속삭이고 있었는데, 막상 그들이 타라고 하니까 별말도 못하고 끌려가듯이 타게 되더라. 한 사람은 얼굴에 칼자국 같은 큰 흉터도 있었고 대화 내용은 “너는 얼마나 했냐” 뭐 이런 식이었다. 우리를 홍천터미널로 데려다준다고 했는데 가는 길도 그쪽이 아닌 것 같고. 여차하면 가방 끈으로 그 사람들 목을 조르려고 꽉 움켜쥐고 있을 정도였다. (웃음) 하지만 어느덧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있더라. 그 사람들은 식물 밀렵꾼들이었다.
-<낮술>도 그렇고 <조난자들>도 그렇고 확실히 외지에 대한 공포심 같은 게 좀 있는 것 같은데,그런데도 여행을 간다는 건 어떤 마음인 건가. =변태 같은 건데 그런 공포를 은근히 즐기는 것 같다. 어린이대공원에 가봤나. 거기 온실 식물관이라는 데가 있다. 비 오고 축축한 날, 특히 평일에 거기 들어가 있으면 굉장히 무섭다. 그런데 그게 무서우면서도 좋다. 혼자 어딘가에 가면 혼자만의 상상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진다. 죽음의 공포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걸 일부러 찾아다니기는 하는 것 같다.
-그런 느낌을 장르적으로 전환한 것이 <조난자들>인 것 같다. 주인공은 잠깐 <미져리> 이야기도한다. =좋아하는 감독이 누구냐에 대한 질문에 늘 어떤 영화들로 답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다보니 내가 롭 라이너의 이름을 많이 말하게 되더라. <스탠 바이 미>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미져리> 등. <미져리>는 이번에 다시 봤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영화 속 작가가 글을 마치면 피우려고 놓아둔 담배 한 개비를 보면서 원작자 스티븐 킹도 이렇게 글을 쓰는 건가 싶더라. 나는 막걸리 한병 갖다놓는데 말이다. 이게 신기해서 나도 잘 모르는 샴페인 돔페리뇽 얘기도 좀 넣었다.
-공포의 남자 학수 역의 오태경이 연기를 잘한 것 같다. =많이 준비해왔더라. 오태경이 내게 묻더라.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인 것처럼 보여야 하느냐고. 그러지 말고 친절하게 보이도록 하라고 주문했다. 경력이 많아서 그런지 내가 원하는 톤을 조리 있게 말 못해도 오히려 금방 알아듣고 바꿔주고는 했다.
-학수의 인상을 어느 정도로 조절할 것인가 하는 것이 감독에게는 초/중반부의 중요한 연출 관건이었을 것 같다. =너무 의심스럽게도, 너무 무섭게도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그냥 눈치 없이 잘해주고 싶은 마음만 앞서는 사람? 예전에 내가 반지하방 얻어서 음악작업을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땐 휴대폰도 없었다. 그래서 약속도 메일로 잡고 그랬다. 사람들하고 대화할 시간도 없고. 내가 원래 말도 느리고 많지도 않은 편인데 그런 상황 때문이었는지 사람들을 만나면 말을 막 쏟아내고 있더라. 학수도 사람들하고 대화할 기회가 없는 사람이라 친절하기는 하지만 눈치 없이 말을 계속 하고 싶은 거다. 다만 그가 교도소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약간의 불편함을 주기를 원했다. 악하다, 착하다보다는 계속 좀 의심스러운 사람. 그게 뒷부분까지 가야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싶었다.
-감독, 각본도 직접 했지만 음악도 직접 했다. 음악의 포인트는 무엇이었나. =사실 처음에는 음악을 좀 덜 넣으려고 했었다. 차분하게 가려고 했는데 편집하는 과정에서 더 세게 들어가도 되겠다 싶어진 거다. 뭔가 더 놀라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분위기를 잡아주면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었다. 엔딩에 나오는 음악도 그런 식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서 넣었다.
-중/후반부에 이르러 몇명의 조역들이 등장하고 나서는 초반의 예상을 벗어나는 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전에 써놨던 ‘조난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게 더해진 거다. 1980년대에 회사원들 네명이 산에 가서 조난당한 이야기였다. 그들에게 하룻밤 동안 있었던 일, 그 이야기를 이번에 섞어보면 어떨까 했던 거다. 무언가 고립된 이야기이니 맞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1996년에 군복무할 때 겪었던 충격적인 ‘어떤 일’도 계기가 됐다. 그 일들을 겪은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는 어땠을까 생각하면서 중/후반부를 정리했다.
-그런데 그 ‘어떤 일’에는 영화적 납득의 과정이 좀 보완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던데. =시나리오 과정에서도 많이 나왔던 의견이기는 한데 내가 그것은 끝까지 가져가야 한다고 했다. 물론 1960년대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 일은 1990년대에도 일어났다. 뜬금없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말도 안 되는 사건이 벌어진 거다. 그게 나한테는 굉장히 리얼하게 다가왔는데, 그 리얼함이 어떤 사람에게는 받아들여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안 받아들여지고 그러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저들은 과연 누굴까, 라는 생각으로 영화를 끝낸거다. 그 대답으로 제목에 자막 처리를 해서 그들이야말로 처음부터 조난자들이었다고 말하는 거다. 그 엔딩에 대해서는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다.
-개연성이 거의 없는 일이 탁 벌어졌을 때의 충격 같은 것인가. =그런 걸 유도했다.
-정리하는 의미에서 그냥 좀 무식하게 물어보고 싶다. 이 영화의 테마는. (웃음) =공포. 사람들간의 선입견. 그러니까 첫인상이란 선입견이 주는 공포. 좀 멋있게 말하면 그렇다는 거고, 내가 상상한 것을 관객이 가상으로 겪어봤으면 하는 내 마음이 통했으면 좋겠다.
-데뷔작인 전작에 비해 제작비가 훨씬 더 많이 든 영화였는데 감독 입장에서 어떤 점들이 새롭게느껴졌는지. =제작비가 30배나 뛰었으니까 더 편해지지 않았겠느냐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노영석 감독의 데뷔작 <낮술>의 제작비는 1천만원이었다. <조난자들>의 제작비는 3억원이다) 사실은 너무 힘들었다. 15회차 촬영에 거의 쉬지 않고 찍었다. 아쉬움이 계속 남았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에서 처음 찍어본 것이라 정말 공부가 많이 됐다. 일종의 관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노영석 감독의 데뷔작 <낮술>이 나왔을 때 우리는 그 영화에 밴 은근한 유머가 가장 큰 재미라고 했다. 혼자 여행길에 오른 남자가 여자를 좇다가 여자도 놓치고 주머니도 털리는 낭패스런 이야기. 그런데 돌아보니 <낮술>의 그 상황은 은근히 공포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여행길의 낯선 자를 조심하라는, 혹은 내가 느낀 그의 인상이 그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 번째 장편 <조난자들>은 그와 같은 사실들을 비틀어 장르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감독 노영석에게는 유사한 상황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꾼의 기질이 있는데 그것이 이번엔 스릴과 공포로 반영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외진 휴양림 펜션에서 주인공이 낯선 이를 만나 벌이는 또 다른 종류의 이야기를 언젠간 만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