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에 입문하고 나서 배성우의 영화 속 첫 이름은 ‘박찬욱’이었다. <미쓰 홍당무>의 조금 순진해 보이는 피부과 의사 박찬욱. 그러더니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에서는 무시무시한 인간 말종, 수시로 형수를 성폭행하는 시동생 ‘철종’으로 출연하여 암암리에 악명을 떨쳤다. <모비딕>에서는 어수룩해 보이는데도 약삭빠른 도박 중개인 맹 사장으로 우리를 포복절도시켰다. <파파로티>에서는 잘난 척 뻐기기 일쑤여서 좀 얄미운 유학파 성악가였다. 적은 분량의 조역인데도 그는 매번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때마다 다른 재미를 주었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그를 점점 더 많은 영화에서 더 자주 만나게 됐다. 최근에만 해도 <몬스터>와 <보호자>에서 연이어 그를 만나고 있다.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조연계의 흥미로운 새 얼굴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가 된 것이다.
-출연작 중 가장 최근 개봉작은 <보호자>다. =<공정사회>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 영화의 이지승 감독님에게 지난해 초에 새해 안부 전화를 드렸다. 요즘은 어떤 거 준비하시냐고 물었더니, <어벤져스2>라고 하시더라. 그때만 해도 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했다. 그 <어벤져스>? <어벤져스>에 대한 다큐인가? 패러디인가? 알고 보니 이감독님이 <어벤져스2>의 한국쪽 프로듀서더라. 하여간에 그렇게 통화를 하고, 영화아카데미 교수인 이지승 감독님이 영화아카데미 장편영화에 출연해보라는 제안을 주셨다. 재미있을 것 같아 하게 됐다.
-<보호자>에서 영화의 3분의 2 정도까지는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아이를 유괴했다고 협박하는 인물이지만 말투가 부드럽고 점잖다. 그 말투가 중요했겠다. =특별히 설계한 말투는 아니었다. 원래는 가이드용으로 내 휴대폰에 녹음해뒀던 게 있었다. 그건 좀더 거칠고 날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후시녹음을 할 때 감독의 요청이 있었다. 약간 점잖고 그리고 어딘가 위에서 내려다보며 지시하는 느낌이 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런 쪽으로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일장일단이 생긴 것 같다. 캐릭터는 강조되지만 영화 속 상황은 조금 덜 강조될 수도 있고.
-<보호자>의 이 남자에 대해 보충설명을 해준다면. =한 남자가 자기에게 아픔을 준 이들에게 똑같이 아픔을 주겠다는 거다. 내 마음대로 해석하자면 이 남자는 원래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기를 굉장히 꺼리는 사람이었을 거다. 그런데 피해 주기 싫어하는 사람이 피해를 받으면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는다. 왜 나만 이런 피해를 입어야 돼, 라고 하면서 마음의 가시가 튀어나온,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라고 봤다. 아프면 사람이 화가 더 많이 나는 법이니까. 기운 자체가 서늘한 그런 인물? 그런데 내가 왜 이런 비정상적인 인물을 자꾸 맡게 되는지 그걸 잘 모르겠네.
-<몬스터>에서도 상태가 그리 정상은 아니었다. 북한 특수요원 출신의 어수룩해 보이지만 실은 가공할 만한 살인 병기인 탈북자다. <몬스터>에는 인상적인 조연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중 하나다. =처음에 황인호 감독이 만나자고 했을 때는 영화에 나오는 깡패 두목 역할을 염두에 뒀었다. 그런데 감독 바로 앞에서 갑자기 대사를 하려니 힘도 들어가고 잘 안 되더라. 감독도 <남자사용설명서>를 보고 나를 택한 건데 생각했던 톤이 아니라고 했다. 황 감독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내 말투가 좀 지적이었나 보더라. 뭔가 훨씬 더 무식하고 우악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거다. 황 감독이 한참 생각하더니, 그럼 이런 역할은 어떠냐고 새로 제안을 한 게 그 역할이다. 생각해보니 그 편이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았다.
-<몬스터>에서 김뢰하와 나란히 차 트렁크에 앉아 크림빵 먹는 장면도 재미있었다. =그때 엄청 큰 크림빵을 다섯개나 먹었다. 사실 나는 내가 맡은 그 인물이 좀 불쌍했다. 말 그대로 사람 죽이는 병기이지 다른 게 아니지 않나. 돈 주면 받고 빵 주면 먹고 하는. 북쪽에서는 엘리트인데 넘어오다가 정신이 이상해진 건지 아니면 아픈 상처라도 있는 건지. 나는 <몬스터>의 인물들이 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영화는 컬트 블랙코미디다. 흥행이 좀더 잘됐으면 좋았을 텐데.
-영화에서는 주로 그런 비정상적인 인물이나 희극적인 인물을 많이 연기했다. 또 그걸 잘하기도 한다. =영화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입장에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건 쉽지 않다. 어쩌다보니 주로 코미디를 하게 됐다. 영화 전체 스토리에 관여하는 역할이 아니라 감초로서 재미를 주는 역할들. 그럴 때마다 많은 감독들이 하는 부탁이 있다. 이거 재미있게 좀 살려주세요, 라고. 그런데 그거 되게 부담된다. 아니, 그럼 재미있게 각본을 써주든가, 하고 속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웃음)
-영화 데뷔작이 <미쓰 홍당무>의 피부과 의사였나. =그렇다. <클로저>라는 연극에서 의사 역할을 맡았었다. 성적으로 솔직하고 마초적인 역할이었는데, 그런 게 잘 어울린다는 말을 곧잘 듣는다. 이경미 감독이 그 연극을 봤다고 하더라.
-그러고 나니 영화계 일이 연이어 들어오기 시작했나. =아니, 당장은 별로 안 들어오더라.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 좀 컸다. 형수를 성폭행하는 시동생. 그 영화 찍고 났더니 아는 사람들이 그러더라. 오해받을 수 있으니 이제부터는 몸가짐을 더 조심해야 한다고. 이게 분량은 좀 있는데 대사가 거의 없다. 역할 이미지도 좀 그렇고. 장철수 감독하고는 친한데, 언젠가 감독에게 물었다. “이렇게 더러운 인물에 도대체 뭘 보고 나를 캐스팅한 거냐. 나, <미쓰 홍당무>에서 의사 역할도 했던 사람이다”라고. 감독이 그러는 거다. “저는 형의 얼굴을 보면서, 바로 저 사람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고. 나 참….
-반면에 <모비딕>에서는 폭소를 끌어냈다. =<미쓰 홍당무> 스탭들을 통해 <모비딕>에 연결됐다. 그 현장에서는 애드리브를 많이 넣었다. (황)정민이 형은 워낙 잘 받아주니까 둘이 주고받으면서 재미있었다. VIP 시사가 있던 날 착오가 있었는지 나를 빼먹고 안 불러주더라. 기술시사 때 봤으니까 됐지 뭐, 하면서 집에 혼자 있었는데 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뭐하냐고 해서 퉁명스럽게 그냥 집에 있다고 했더니 빨리 오라는 거다. 영화 본 사람들이 다들 찾고 난리났다며. 그때는 기분이 좀 좋더라.
-<모비딕>에서는 무언가 엇박자의 호흡으로 연기하는데, 그게 좋았다. =연극을 오래해서 그런지 대사 못지않게 대사의 행간에 신경을 쓰게 된다. 그리고 사실 일상에서도 정박으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각자의 호흡이나 리듬이 있다. 그래서 생각하면서 천천히 말할 때도 있고 생각이 딱 나면 후루룩 들어가기도 하고. 그런 게 진짜 사람이 말하는 거 아닌가 싶다. 연극할 때부터도 일부러 만든다기보다 하다 보면 그런 호흡들이 나오는 것 같더라. 앞에 있는 배역에 따라 호흡과 템포가 달라지기도 하고.
-그 밖에 요즘 출연작 중에서 스스로에게 뜻깊었던 작품을 꼽는다면. =<집으로 가는 길>이다. 다른 의미가 아니라, 간만에 역할에 대한 고민을 했던 작품이다. 어떻게 해야 스토리 내에서 내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지금까지는 주로 감초 같은 특이한 역할을 많이 하지 않았나. 하지만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면서도 소소하게, 유머와 정서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그런 역할도 하고 싶다. 어떤 감독이 그러더라. 당신이 독특한 캐릭터 배우라는 생각에서 기용한 건데,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고. 그 말에 기분이 좋았다. 사실 배우의 어떤 모습이 자연스럽게 영화에 투영되어 녹아들고, 그리고 이야기 내에서 설득력 있게 기여하는 것, 그게 가장 좋은 게 아닌가 싶다. 어떤 배역을 하든지 간에 그 배역에 관객이 몰입하게 하면서도 그걸 배성우라는 배우가 하고 있다는 느낌을 동시에 주면 가장 좋을 것 같다. 물론 그게 가장 고민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같이 일해보고 싶은 감독이 있나. =이창동 감독님 영화를 좋아한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창동 감독님 영화 보면서 무지 많이 웃는다. 현장에서 테이크 많이 간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나는 테이크 많이 가는 거 되게 좋아한다. (웃음)
-뮤지컬로 연극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레미제라블>이 시작이었다고.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는 건 좀 색다른 감상이었겠다. =22살 무렵에 군대도 가기 전에 했던 작품이다. <레미제라블>에서 1인10역 정도 했던 것 같다. 악보와 CD 가져다놓고 몽땅 외웠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모든 노래의 가사가 다 기억난다.
-재주가 많다고 들었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재즈무용을 하다가 20대 중반에 서울예대에 들어갔다고. 이후에는 뮤지컬 배우를 오래 했고. =노래를 좋아하니까 막연히 뮤지컬을 떠올린 것 같다. 그럼 뮤지컬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다보니 춤을 배워야 할 것 같더라. 당시에는 뭘 몰랐으니까, 연기야 뭐 어떻게 되겠지 하면서 춤 학원부터 알아봤다. 뮤지컬에서 쓸 만한 춤이 뭐가 있을까? 그래 재즈. 그래서 재즈댄스 회원으로 등록해서 하루에 한 시간씩 배웠다. 그런데 춤바람이 들어서 패가망신한다는 게 이런 맛이구나 싶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그 시절에 재즈무용으로 강연도 했다던데. =그건 그냥 아르바이트로. 무용단에 남자 무용수가 많지 않다. 무용과 나온 남자들은 대개 발레, 컨템포러리, 한국무용을 한다. 재즈무용쪽은 별로 없다. 어설프기는 하지만 열심히 하는 것 같고 하니까 아예 단원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라. 단원이 먹고살 수 있는 건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강연하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그 시절에 가끔씩 오는 객원 친구들이 학교를 다니는게 더 좋지 않겠느냐고 하기에 26살에 학교에 간 거다. 그렇게 학교 다니면서 단원 생활을 했고 졸업하고 나서부터는 뮤지컬을 계속 했다.
-극단 ‘학전’의 오랜 배우라고도 들었다. 어떻게 연을 맺었나. =학전의 뮤지컬은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배우의 연기가 관건이라는 느낌이 있었고 그게 좋았다. 특히 학전의 <의형제>라는 작품의 역할이 무척 해보고 싶어서 오디션을 봤는데 정말 하고 싶었던 그 역할을 하게 된 거다. 지금도 그 연극에서 맡았던 인물 이름을 내 아이디로 쓸 정도다. 나름 학전의 배우들 사이에서는 <의형제>를 했던 사람들끼리 자부심이 좀 있을 정도다. 그 뒤 아동/청소년극도 좀 했다. 애들은 정말 가차없다. 못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재수 없다고 소리친다. 그들을 몰입시키는 방법밖에는 없는 거다. 하지만 반응하기 시작하면 그 정도의 뜨거운 관객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실제로 초등학교 여학생이 나한테 전화번호까지 건넸다는 거 아닌가. (웃음)
-한국영화에서 뮤지컬 장르가 활성화된다면 내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는데, 하는 마음은 없나. =아니 별로 없다. 요즘도 뮤지컬을 가끔 하지만, 이제 내게 노래와 연기는 서로 많이 다른 것 같다. 설득력 있게 노래를 한다는 것과 설득력 있게 연기를 한다는 건 이제 서로 다른 일로 느껴진다. 뮤지컬도 여전히 좋지만 지금은 영화 연기가 더 재미있다.
-영화 차기작으로는 어떤 작품들이 있나. =<빅매치>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등을 지금 찍고 있다. <빅매치>에서는 굉장히 살벌한 조직의 우두머리다. 사채도 하고 도박도 하고 돈도 좀 있는 건달. 그런데 주인공에게 엄청 얻어맞는.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는 주인공 신랑의 친구 중 한명으로 나온다. 또래 친구들보다는 형인데도 결혼도 못하고 눈치도 없는 그런 인물이다.
-영화계에는 다소 뒤늦은 나이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셈이다. 나이 때문에 부담되진 않나. =아예 안 된다면 거짓말이지. 좀 젊었을 때부터 영화도 찍고 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즐기려고 한다. 건강관리 잘하면 30대나 40대나 뭐 크게 차이날까 싶다. 30대에 일 들어왔다가 40대에 끊기는 사람도 허다한데 뭐. 그리고 내가 원래 뭐든지 좀 마음 편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웃음)
배성우는 인터뷰가 있던 날 아침 8시까지도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촬영장에 있었다고 했다. 그 밖에도 이미 <상의원> <인간중독>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고 개봉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를 부르는 현장이 점점 더 많아질 거라고 예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새 일이 부쩍 늘었다며 씨익 웃는다. 배성우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얼마 전 사석에서 우연히 만난 무속인 한 사람이 그에게 해준 이야기를 슬쩍 들려준다. “그 사람이 나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하더라. 당신 좀 원래 다중(성격)이라고. 그리고, 앞으로 잘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