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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의 일상어 사전] 내가 니 애비/에미다
권혁웅(시인) 2014-05-16

[ 내가 니 에비/에미다ː ]

겉뜻 출생의 비밀을 밝히는 결정적인 폭로 속뜻 이건 막장드라마라는 선언

주석 어떤 부모도 자식에게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부모자식 관계란 선험적인 것,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므로 조금도 의심의 대상이 아니다. 이미 각인되어 있으므로 부모자식간에는 저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저 말은 아버지가 아니라 옆집 아저씨가,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 친구 아들의 바로 그 엄마가 해야 할 말이다. 미국의 경우, 10% 넘는 비율로 같은 집에 사는 호적상의 아빠가 아이의 실제 아빠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 어디서나 막장드라마가 인기인 것을 이해할 만하다. 아홉집 건너 한집씩 리얼리티 쇼를 찍고 있으니.

지난번 대선토론 때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했다. 저는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대한민국과 결혼했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돌보는 마음으로 나라를 돌보겠습니다. ‘나는 모태솔로’라는 감성에 호소하는 슬로건이기도 하고 왕과 부모를 동일시하는 <안민가>의 공화국 판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거기에 내재한 무의미의 논리가 놀라웠다. 아이를 낳지 않았다고 하면서 어떻게 부모의 마음을 가질 수가 있지? 하지만 그때는 연설문을 써준 사람의 식견이 의심받았을 뿐 그 말의 참뜻은 알려지지 않았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 선장이 달아나고 일등, 이등, 삼등 항해사가 달아나고 조타수와 기관장과 기관사가 달아나고 조기장과 조기사가 달아났다. 너희들은 방 안에 있어, 꼼짝 말고 있어! 착하게 그 말을 따라한 어린 학생들이 수장되는 동안, 열 손가락 어디를 깨물어도 아픈 순하고 고운 아이들이 무더기무더기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동안, 우리는 나라의 부모를 자처하는 이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보았다. 가장이 가계 파산의 책임자를 찾아내겠다고 벼르는 모양을, 상주가 유족은 모른 체하고 조문객을 조문하는 기이한 광경을 우리는 보았다. 대부분 사진을 찍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한 삼촌은 우는 부모 옆에서 라면이나 먹고 돌아갔고 다른 삼촌은 그때 계란을 풀어먹은 건 아니라고 약을 올렸다. 또 다른 삼촌은 추모 리본의 색깔이 맘에 안 든다고 생떼를 썼고 또 다른 삼촌은 여기는 내 관할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소풍 왔다는 사실을 누설했다. 우리는 알았다. 2014년 대한민국은 막장드라마다. 우리는 알았다. 우리가 아는 애비/에미는 우리의 실제 애비/에미가 아니었음을. 드라마는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임을.

용례 <스타워즈>의 저 유명한 대사(“아임 유어 파더”)는 악의 화신마저도 길고 긴 친자확인소송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반대로 우리에게는 홍길동의 슬픔이 있다. 진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 그런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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