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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개싸움 위해 희생하리라

<캠페인> <일렉션>, 드라마 <웨스트윙> 등에 등장하는 선거 전략가의 길

<캠페인>

한국 최고(最古)의 빵집이라는 군산 이성당이 그냥 군산 빵집이었던 좋은 시절의 이야기다. 그때도 이성당 단팥빵은 맛있었고, 소보루빵과 야채빵도 맛있었고, 아이스크림도 맛있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ㄱㅅ국민학교 어린이회장 선거인단 매수 사건, 일명 이성당 회동. 어린이회장을 했다고 도움이 되는 국제중학교 입시 같은 것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아들 소원은 뭐든 들어주고 싶었던 장(하고 부유)한 어머니는 선거권이 있는 4, 5, 6학년 학급 임원들에게 알렸다. 모월 모일 모시에 이성당으로 오라고, 친구 데려와도 된다고. 나는 친구들과 동생 손을 잡고 이성당에 가서 난생처음 줄을 서서 테이블을 차지한 다음 빵을 양껏 먹고 밀크셰이크도 마셨다. 지금도 생각난다, 나비넥타이를 매고 어색한 표정으로 테이블 사이를 돌며 수줍게 인사를 건네던 부잣집 외아들의 얼굴이. 빵으로 배가 불렀던 우리는 모두 즐거웠다. “네, 아줌마! 승훈이 찍을게요!” 부잣집 어머니와 외아들도 즐거웠다. 즐거운 마음으로 또 한번의 이성당을 약속했다. 그러나…. 며칠 뒤에 치러진 어린이회장 선거에서 그 애는 3위를 했다. 세명 중 삼등. 배운 대로 실천하는 착한 어린이들은 빵만 먹고 다른 아이를 찍었던 것이다. 선거는 개싸움이로구나 하고 깨달았던, 참 좋은 시절의 추억이다.

<웨스트윙>

‘dogfight’,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개싸움. 제목부터 정직한 영화 <캠페인>은 원래는 더욱 정직한 제목으로 시작되었으니 <Dogfight>였다. 이 영화는 장래 부통령을 노리는 하원의원(이라지만 뭐가 부통령감이라는 건지 알 수가 없는) 캠이 부자 아빠와 그보다 부자인 아빠 친구가 돈 쥐어주며 등 떠밀어 출마한 동창하고 겨루며 개싸움, 아니 선거운동을 하는 이야기인데, 며칠 전까지 전국에 생중계된 여러 개싸움, 아니 선거운동은 비교도 되지 않는 개싸움, 아니 선거운동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싸움의 와중에서 존재감도 없이 실업자로 사라진 조연이 있으니, 캠의 참모이자 친구라지만 하는 일은 주로 사고 뒤처리 담당인 선거 본부장이다. 사실 다른 일을 하려야 할 수가 없다. 그의 후보는 바쁘다. 바람 피우고, 음란 전화를 걸고, 음주운전을 하고, 아기와 강아지가 연루된 (이런 치명적인!) 폭행 사건도 저지른다. 이걸 전부 수습하고 선거에서 승리하느니 그냥 자기가 다시 태어나 하원 의원 되는 편이 빠르겠다.

게다가 상대 진영 선거 참모는 어디서 데려온 건지 완벽한 능력에 못된 성질까지 갖추어 후보를 쥐 잡듯 잡는 사람인 데다 결정적으로 후보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뭘 할지 몰라서 아무것도 안 한다. 후보 본인도 모자라 가족까지 나서서 상대 진영에 표를 몰아주는 정 후보, 아니 캠 후보에 비하면 가히 신이 내린 후보라 할 수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후보가 큰(大) 선거(選)에서 이기는 건(붙여서 읽지 마라) 동서를 막론하고 현실과 픽션을 넘나드는 진리인 것인가, 그런데 그게 선거인가.

그래서 고등학생이 나섰다, 이게 바로 선거라며. 영화 <일렉션>의 야심만만한 학생회장 후보 트레이시는 어찌나 야무지고 똘똘한지 혼자 추천을 받아 후보 등록하고, 친구도 없으면서 도대체 어디서 났는지 애들 풀어 선거운동하고, 음모와 술책으로 점철된 선거의 길을 걸어간다, 또박또박. 이런 후보만 만났다면 어린이들이 이성당을 통째로 털어먹을 필요가 없었을 텐데.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경쟁자의 선거 벽보를 찢는 트레이시를 보며 나는 내가 운동원이었던 선거를 떠올렸다. 때는 대학이 무한경쟁으로 돌입하기 직전의 20세기, 아직은 순수와 열정이 가득했던 청순하며 낭만적인 캠퍼스… 일 리가, 세상에 그런 데는 없다. 우리는 인쇄소 아저씨의 실수로 선거 자료집이 규정보다 5mm 크게 나오고, 새벽에 보니까 플래카드 끈이 끊어졌기에 누가 다시 묶은 걸 플래카드를 두번 내건 걸로 판정받아 실격당했다. 지금도 궁금하다, 걔네는 우리도 몰랐던 걸 어떻게 알았을까. 선거는 개싸움이로구나, 두 번째로 깨달았던 청춘의 추억이다.

이 세상에 진정 아름다운 후보와 아름다운 선거 참모들은 없는 걸까, 아니 있다. 백악관이 배경인 TV시리즈 <웨스트윙>은 두 번째던가 세 번째 시즌에서 바틀러 대통령이 바틀러 후보이던 시절을 보여주는데 가망 없는 선거 본부에 합류한 친구가 잘나가는 친구를 데려오려고 (네가 친구냐) 꺼내는 말이 이거다. “잠깐 나가서 핫도그나 먹을까?” 핫도그 하나에 딸려온 선거 참모, 그런데 미남! 후보가 유세하지 말고 너가 유세해라! 그럼 난 무조건 한표!

<일렉션>

그걸 보며 생각했다. 우리 잠깐 좌판 가서 순대 한쪽 할까? 그런데 말이지, 우리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으로 지고는 있어도 말이지, 대통령으로는…. 이런 사람 또 없는데…. 그럼 20년 우정에 종지부를 찍겠지. 벗이여, 어서 가게나.

먼 옛날, 이성당 단팥빵이 최고로 맛있는 간식이었던 시절, 또 한번의 이성당을 뿌리치고 한표를 행사한 어린이들이 있었다(아, 근데 나는 제일 잘생긴 애 찍었다. 정민아, 그 얼굴 간직하면서 키만 자랐기를). 한반도 남쪽 끝에서 상경해 저임금 직종에 몸담았으나 불가사의한 이유로 서울 시내 다세대 주택 건물주가 된 직장 동료는 동네 재개발이 무산되었다며 이성을 잃고 분노의 한표를 행사하려 했지만 동료의 만류로 선거 당일 집에서 푹 쉬며 다음날의 노동을 위해 재충전하는 편을 택했다. 하지만 말린다고 먹힐 일인가, 그도 알고 있었다, 이건 아니라고. 어린이의 단팥빵과 서민의 재개발,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당근을 포기한 한표 또는 기권. 그러고 보니 선거가 개싸움이라고 투표마저 그런 건 아니구나. 이건 여담인데 이번에 내가 매우 좋아하는 우리 동네 시장이 재선되어서 기뻤다. 그 사람이 고양이 머리띠를 하고 사진 찍었다고 좋아하는 건 아니다. 설마 그럴 리가, 아무 상관없다.

너무 잘생긴 후보는 곤란해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만나야 하는 두세 가지 것들

후보를 잘 만나야 한국 선거의 쟁점이 병역과 부동산 투기라면 미국은 섹스 스캔들이다. <킹메이커>에서 미남 주지사 후보(조지 클루니)와 똑똑한 선거 캠프 홍보 담당자(라이언 고슬링)와 예쁘고 집안도 좋은 인턴(에반 레이첼 우드)이 더불어 망하는 것도 섹스 때문이다. 영남 지방 유서 깊은 유학자 가문의 자손인 동춘서커스 박동수 단장은 일찍이 조부로부터 일생 입을 조심하고 손을 조심할 것이며 그곳을 조심하라는 가르침을 받아 평생을 지켜왔다 했으니, 무릇 어디가 되었든 어딘가의 장(長)이라면 그 세 가지를 경계할 일이다.

기자를 잘 만나야 그렇다, 워터게이트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의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전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민주당을 저지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도청 등 권력 남용으로 말미암은 정치 스캔들이었다. 사건의 이름은 도청이 이루어진 장소로, 당시 민주당 선거운동 지휘 본부가 있었던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유래한다. 닉슨은 결국 이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사퇴했다. 그 뒤 수많은 정치 스캔들이 일어날 때마다 ‘00 게이트’라 명명되면서 지금껏 워터게이트 사건은 그 위엄을 과시하고 있다. 그걸 파헤친 건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인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었고 그걸 퍼뜨린 건 TV였다. 어릴 적에 볼 땐 그저 그랬는데 어른이 된 다음에 대선 후보의 약점을 호미도 없이 맨손으로 파묻던 열정적인 일간지 기자들을 목격하니(그래서 그분은 무사히 당선),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영화 <닉슨>이 매우 사무쳤다는, 때 묻은 시절의 추억이다.

휠체어를 잘 만나야 이것이야말로 진짜배기 선거운동이라며 과시하는 영화 <밥 로버츠>다. 얼굴 작고 키 크고 노래 잘하고 운동 잘하고 돈 많고…. 이런 백만장자 철옹성이 고작 비리와 마약이라는 개미구멍으로 무너지려는 찰나, 뜬금없이 저격을 당한 밥 로버츠(팀 로빈스)는 휠체어를 무기 삼아 선거의 국면을 바꾸는데…. 휠체어, 휠체어, 동서를 막론하고 현실과 픽션을 넘나드는 무기, 휠체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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