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초이스 > 도서
2002 겨울 <시평>(제6호)
2002-02-28

시인들만의 집

한 10년쯤 됐나. 세계사에서 같은 시기 출간된 시집 한 댓권을 한꺼번에 모아 합동출판 기념회를 치른 적이 있는데 그 기억이 지금도 삼삼하다. 출판사쪽에서는 초대형 양주 한병(그게 그냥 장식용이 아니라 그 안에 진짜 양주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을 내고 나머지는 시인 당사자들이 경비를 부담했던, 당시 세계사 주간이었던 최승호(시인)가 마련한 그 술자리에는 시인들‘만’ 한 60명이 모여 놀고 있었다. 아니 평론가 황현산도 있었고, 시업과 무관한 자도 10명은 되었겠으나 모두 그 시인의 흐름 속에 시인이었다. 함민복(시인)이 선두에 선 춤행렬로 끝난 그 잔치는 감촉이 아주 부드럽고 부딪치듯 미끄러지듯 찰박하고 또 아늑한 거라서 모두 만취 상태로 흥에 겨웠는데도 도무지 술자리였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시인들의 집이 있으면 좋겠다…. 나는 그런 감상에 뉘우침 없이 젖어들었었다. ‘시인들이 함께 만드는’ 계간 <시평>을 받아보는 날은 그런 감상에 모처럼, 혼곤히 젖는 날이다. 아담하고 상큼한 표지(이 책을 만들어주는 김인호 사장에게 늘 감사. 이 책은 디자인 또한 시인들의 집이다)는 그대로지만, 100쪽 안팎으로 시작했던 <시평>은 6호에 이르면서 228쪽으로 늘어났다. ‘시인들’이 만드는 책으로는 원래 처음이고, 이제 어느 시전문지보다 두꺼운 분량이다.

시인들이 쓰는 ‘시평’은 어떤 맛일까? 이미 얘기했다. 문학평론가들의 시평보다 더 구체적이고 어떤 때는 매우 가혹하면서도 그 맛의 ‘감촉이 아주 부드럽고 부딪치듯 미끄러지듯 찰박하고 또 아늑’하다. 그리고 거꾸로, 마신 술도 깰 듯 투명하고 말짱한데도(개인적으로, 이 책을 만드느라 ‘혈안’이 된 고형렬, 박영근 시인 등의 노고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평하는 예술’에 취해, 마냥 잔칫집 같다.

신경림도 그랬을까. 그는 시인들의 집 ‘완공’을 축하하듯, 아니 자축하듯, ‘명품’ 신경림 ‘치고도’ 명품인 시 한편을 평가 목록에 올리고 있다. 제목은 누항요(陋巷遙). 누항을 거닐다… “이제 그만둘까 보다, 낯선 곳 헤매는 오랜 방황도./ 황홀하리라. 잊었던 옛 항구를 찾아가/ 발에 익은 거리와 골목을 느릿느릿 밟는다면./ 차가운 빗발이 흩뿌리리, 가로수와 전선을 울리면서. 꽁치 꼼장어 타는 냄새 비릿한 목로에서는/ 낯익은 얼굴도 만나리, 귀에 익은 목소리도 들리리. 이내 어둠은 옛날의 소꿉동무처럼….”(앞부분)

잦은 마침표 사용에 유의하면 더 맛있다.(바다출판사 펴냄)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